한국과 유엔의 관계는 각별하다. 우리현대사를 논할때 유엔을 빼놓고는 얘기할수 없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건국과정부터 직.간접적으로 개입한 유엔에대해 갖는 감회도 그래서 남다르다. 여기다 창설반세기를 맞는 유엔의 역사는 제2차 세계대전 종전후 우여곡절끝에 맞이한 우리의 광복 50년 역사와도괘를 같이해 또다른 의미를 갖게 한다.유엔은 1948년유엔한국임시위원단을 설치,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위해 치러진 총선을 감시했고,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났을때는 자유세계 수호라는 대의명분으로 참전, 16개국의 젊은이들이 피를 흘렸다.
한국전쟁은 유엔창설이후 집단안보노력이 밖으로 표출된 최초의 사건이었다.
전후 우리나라의 재건을 지원한 유엔의 활동도 무시할수 없다. 한국내 구호와 재건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한 유엔한국통일부흥위원단(UNCURK)과 한국부흥계획을 추진하기 위한 유엔한국재건단(UNKRA)이 50년에 설치돼 73년까지활동을 계속했다.
또 유엔에서는 한국의돌발사태가 다뤄지기도 했는데 기억하기도 싫은 구소련전투기의 KAL기 격추사건(83년)과 랑군 암살폭파사건(83년)이 유엔 안보리와 총회에서 각각 다뤄진것이 그 예다.
이어 91년 9월19일(46차 유엔총회개막일)에 성취된 한국의 유엔가입은 남북한이 유엔에서 발언권을 얻어 국제적 지위를 향상시킬 수 있는 바탕과 함께 동북아시아 질서형성에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사실 당시 한국의 유엔가입은 40여년에 걸친 눈물겨운 노력의 결정체였다.우리나라는 정부수립 다음해인 49년부터 유엔가입을 추진했다. 하지만 가입을 시도할때마다 상임이사국인 소련이 거부권을 행사하는 바람에 번번이 좌절됐던 것이다.
우리의 유엔가입은 다른나라와는 달리 특이한 형태를 띠었다. 제2차 세계대전후 탈식민화 과정에서 탄생한 대부분의 신생국은 유엔회권국부터 된 다음에 유엔의 온갖 도움과 원조를 받아가면서 근대국가의 실질적인 모습을 갖췄다.
반면 우리는 남북한의 특수성으로 인해 근대국가 건설에 성공, 유엔을 도울수 있을 만큼 성장한 다음에야 유엔에 가입했다. 때문에 우리의 유엔가입은 한국외교의 출발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절정을 이뤘다고 보기에 충분했다.한국은 인권 군축 마약등 범세계적 문제해결을위한 국제적 노력에 적극참여하였고 유엔개발계획(UNDP)이나 유엔교육과학문화기구(UNESCO), 세계보건기구(WHO), 유엔환경계획(UNEP)등의 이사국으로 선출되기도 했다.게다가 한국은 지난 5월 스리랑카의 후보사퇴로 아시아지역에서 단독으로안보리 가입을 사실상 확정짓는 쾌거를 이룩했다. 이번 유엔총회기간인 10월말이나 11월초의 총회선거에서 한국이 회원국 3분의 2이상의 지지를 얻어 안보리 진출국으로 확정되면 국제사회에서의 위상을 한단계 높이는 계기가 될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유엔가입후 남북한의 개방과 변화가 기대만큼 진전되고 있는지는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남북한이 유엔에 가입한 상황에서 유엔은 양측의 접촉이 언제라도 가능한무대가 됐는데도 남북대화의 장으로 활용하는 지혜를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북한의 개혁.개방을 촉진시키면서 동시에 우리정부도 좀더 발전적 사고 방식으로 냉전시대의 부정적 유산을 시급히 청산하는 것이 유엔 반세기를 맞는현시점에서 남북한이 안고 있는 과제라 하겠다.〈유엔본부 .최문갑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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