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정약용이 18년간 강진으로 유배된 것은 그의 가계가 기호 남인이었던탓도 있지만 서교(천주교)를 믿은 것이 결정적 계기였다. 서교가 날카로운정치문제로 부각된 것은 정조시대부터다. 당시 서양 종교로서의 서교와 과학기술로서의 서학은 구별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서교에 대한 배척과 탄압이서학에까지 미치게 되었다. 특히 1801년의 신유사옥이후 서교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이 시작되면서 서학은 발전이 위축되고 두절되고 말았다.서학 발전의 좌절은 남인 실학파의 정치적 실각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서양의 과학기술을 수용해 근대화로 나아가야할 시점에 1880년대까지 80여년간 서양 연구의 공백시대를 맞은 것이다. 따라서 신유사옥은 우리 나라의 근대화를 가로막은 커다란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을 이웃 일본과대비해 보면 신유사옥이 끼친 악영향이 보다 확연히 드러난다.일본의 강호막부(1603~1867)는 서양에 대해 쇄국을 하면서도 네덜란드에게만 북구주와 장기를 개항, 무역을 허가했다. 물품거래는 허가됐으나 서양서적의 수입은 엄금했다. 이것이 1630년의 금서령이다. 그러나 1720년 일본은서교와 서학을 구별해 기독교 서적을 제외한 과학기술 서적은 금서를 해제했다. 뿐만 아니라 막부는 1740년 일단의 유학자들에게 난학(네덜란드어와 그학문)의 연구를 지시했다. 이러한 배경속에서 1774년 전야양택 등 세 사람이네덜란드 해부학원서를 번역,'해체신서'를 발간했다. 전야는 이후에도 계속 병서 '네덜란드 축성서' 지리서 '러시아본기'를 번역한다.이처럼 일본은 서양과학기술 서적의 금서를 해제하고 난학 연구를 장려한결과 병기와 병법, 의학을 비롯한 과학기술에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했다.서교와 서학을 구분없이 배척하던 우리와 날이 갈수록 천양지차로 격차가 벌어진 것이다.다산은 1784년 23세때 큰 형수의 제사를 지내고 서울로 돌아가던 길에 이벽을 통하여 처음으로 서교(천주교)를 접했다. 다산은 이후 4~5년 동안 천주교에 몰입했으나 1791년진산사건(윤지충과 권상연이 제사를 폐지하고 신주를 불태운 사건)이 일어난 뒤 천주교에 대한 금교령이 내려지면서 절의했다고 자찬묘지명에서 밝히고 있다. 그러나 천주교회측에서는 다산이 일시적으로 배교의 길을 걸었으나 귀양에서 풀려난 뒤 다시 천주교에 귀의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달레, '한국천주교회사')
천주교회측의 주장에 대해 사학계는 다른 견해를 밝히고 있다. 다산이 천주교를 믿었다고 볼 만한 다산의 저술이나 공식 문헌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 이우성교수는 "젊은 시절 천주교 서적을 많이 읽었고 또 믿었기 때문에 다산의 사상형성에 천주교가 영향을 준 것은 인정한다"면서도"율곡이 불교에 귀의한 적이 있고 그의학설이 불교영향을 받았다고 해서율곡을 불교신자로 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다산도 천주교 신자로 볼 수없다"고 주장했다. 서울대의 신용하교수도 "다산이 귀양가서 유학경전에대한 연구·주해서를 상당히 많이 지었고 환갑때는 아들에게 상례를 어떻게할 것인가에 대해 정밀한 유교적 지침을주고있는 것으로 미루어 천주교에귀의한 것으로 보기 어렵다"고 말했다.
그러나 다산 사상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경학사상에 천주교의 영향이 미쳤다는 점은 학계에서도 대체로 인정하고 있다. 음양오행설의 부정 등이 천주교의 영향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 서울대 금장태교수는 "다산의 경학사상이 지닌 기본 특징은 유교이념을 천주교 교리의 구조와 더불어 재해석, 유교사상에 새로운 영역을 열어주었다"며 "다산의 개인적 신앙이 무엇이었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의 사상이 오늘에 어떤 의미를 지니느냐가 보다 중요하다"고 말했다.
일본 화원대의 강재언교수는 "다산이 서교에 대해 불철저했고 '배교'문제도 있었으나 서학 수용은 긍정적인 자세로 일관하고 있다"며 다산의 과학정신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강교수는 수원성 축조공사에서 정조가 내려준'기기도설'을 참조하여 다산이기중기를 고안, 4만량의 경비를 절약한 것을 대표적인 예로 들고있다. 다산이 서양의 과학기술과 기술개발에 대한 관심을 보인 대목은 이밖에도 많다. 다산은 기술도입과 국내보급을 전문적으로관할하는 이용감의 신설을 제안했다. 또 기술개발의 기초를 '수리'에 두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강교수는 "다산의 이같은 과학적 견해는 우리 나라의 과학기술을 자립발전의 길로 나아가게 하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가져올 수 있는획기적 사상"이라며 서학발전을 가로막은 신유사옥을 비판했다. 신유사옥후공서파와 이에 이은 위정척사론의 서교에 대한 공세와 박해가 서학 자체의발전을 두절시켜 동아시아 3국중 서양연구가 가장 뒤떨어진 나라로 전락했다는 것이다. 결국 자본주의 열강에 의해 무력으로 문호를 개방하게 되고 이후개화운동의 주체형성을 더욱 어렵게 했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정약용 등 남인 시파의몰락을 초래한 신유사옥은 당파적혹은 종교적 탄압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율적인 개국·개화와 직결되는 역사적및 사상적 계기를 뿌리째 말살한 정치사상적 반동공세였다는 것이 학계의 평가다. 〈조영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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