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박홍규의 '필름 세계'-안제이 바이다의 '단통'

정치영화의 귀재라고 하는 폴란드의 안제이 바이다가 만든 '단통'은 프랑스 혁명의 중요한 지도자였던 민주주의자 단통과 독재자 로비스피에르의 갈등을 주로 담고 있다. 그런데 단통보다 로베스피에르에게 호감을 갖는 프랑스인의 역사의식과 달라 미테랑대통령을 비롯한 프랑스인들의 분노를 샀다. 그러나 바이다는 혁명에 우롱당하는 인간과 혁명의 본질을 물었다.18세기 후반 유럽에서 최대의 국가였던 프랑스의 경제는 계속 급성장했으나 정부의 재정은 더욱어려워졌다. 왕과 왕비의 사치스러운 궁정생활 때문이었다.

1789년 5월, 역사적인 삼부회가 열렸다. 그것은 중세 이래의 신분제 의회였으나 1백75년만에 정부가 재정위기를 타개하기 위하여 신분에 관계없이 토지세를 부과하고자 한 것에 대해 귀족들이 반발, 그 소집을 요구하여 열린 것이었다. 6월중순 제3신분의 대표들은 부채의 탕감과 절대주의의폐지등을 요구했으나 왕은 거부했다. 그래서 7월 제3신분만으로 '국민의회'가 열려 헌법 작성을시작했다. 왕이 군대철수를 거부하자 7월14일 시민들이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여 혁명이 시작되었다. 이어 8월 저 유명한 인권선언이 채택되었다. 그것은 지금까지 민주주의의 강령이 되어왔다.혁명 초기 3년간은 입헌군주제였으나 1792년 4월, 지금은 프랑스 애국가가 된 '라 마르세이에즈'를 부르며 오스트리아와 전쟁에 참가한 의용병들이 국왕의 폐위를 요구했다. 이어 1793년부터 프랑스혁명은 새로운 의회인 '국민공회'의 시대에 접어들었다. 공화국이 선언되고 왕과 왕비가 처형당했다. 그 길로틴 위에서 단통은 외쳤다. '유럽의 국왕들이 우리에게 도전해 올 것이다. 저들에게루이의 목을 던져 주자!' 그러나 그 자신, 다음해 같은 곳에서 사형당할 줄을 그는 몰랐다.단통은 공포정치를 끝내기 위해 친구들과 함께 신문을 발행하면서 특히 '프랑스에 적대하는 외국과 대화로 유대관계를 맺어야 한다'고 주장하여 로베스피에르와 대립했다. 그리고 그는 국민공회에 비밀경찰이 있다는 사실을 폭로했다. 다음해 국민공회는 단통을 체포하고 반혁명분자를 일소했다. 의회는 그 체포가 부당하다고 항의했으나 로베스피에르는 교묘한 연설로 의회를 설득했다.재판이 시작되었으나 단통은 굴복하지 않았다.

재판에서 그는 부정부패의 혐의를 받았으나 자신이 재판을 받는 이유는 '자신이 성실하게 진실을말했기 때문'이라고 항변하고 '행복과 정의를 위하여 독재와 싸우자'고 호소하여 민중을 감동시켰다. 그는 혁명재판소를 부정하나 의회는 새로운 법으로 그의 변론을 금지하고 그는 35세의 나이로 길로틴에 얹혀 사형당했다. 그는 '나의 목을 모두에게 보여라. 그만한 가치는 있다'라고 당당히 말했다. 〈영남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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