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민련 김종필총재는 요즘 한 시구를 자주 인용한다. 로버트 프로스트의'나는 지켜야 할 약속이있다. 잠들기 전에 가야 할 몇마일이 있다'는 구절이다. 그의 표현을 빌린다면 여기에서 '잠들기전에'는 '정계를 물러나기 전'이라는 말이고 '가야할 나머지 몇마일'은 '내각제'이다.5·16의 주역으로 만년 2인자였던 그가 최후의 정치적인 선택으로 내각제라는 화두를 던지고 있는 셈이다. 그는 평소 지론인 내각제를 실현해야만 이땅에 민주주의가 뿌리내린다고 입버릇처럼강조하고 있다. 이 때문에 그는 갖은 억측속에서도 내각제를 무기로 여야를 오가며 한판의 도박을 벌이고 있는 중이다.
노정객의 몸부림치고는 상당한 파워를 발휘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실제로 몇몇 사례를 볼때 그의 정치적 결단을 결코 가볍게 보아 넘길 수는없다. 신군부에 의해정치활동이 금지됐던 그가 87년 정치 재개이후 보여준 일련의 예가 그것들이다. 첫째는 87년 신민주공화당 창당후 대선에 출마한 그가 88년 13대총선에서 35석의 원내교섭단체를 구성해 재기에성공한 것이다. 또하나는 민자당 탈당과 자민련의 창당이다. 이때 그는 "3당통합의 정신을 짓밟고신의와 약속을 저버린 당에 더이상 남아 있을 이유가 없다"며 민자당을 탈당했다. 그는 이후 창당 석달만에 6·27지방선거에서 4곳의 민선지사와 시장을 내는 성과를 거두었고 창당 1년만에 치른 15대총선에서도 50석의 원내 교섭단체를 구성하는 약진을 보였다.
그의 정치역정은 영욕과 부침의 세월이다. 5·16이후 박정희와 '혁명'을 함께한 2인자였지만 권력의 견제와 핍박은 끊일 날이 없었다. 그의 측근은 "박정희는 김종필의 견제 세력이 기승을 부리면 김종필을 일시에 옆으로 밀쳐놓았다가도 자신이 외롭고 어려울때면 꼭 김종필을 찾았다"고 말했다.
그는 공화당 창당을 둘러싼 내부갈등으로 외유를 떠나는등 박정희정권 시절모두 3차례의 낭인생활을 경험하게 된다. 그중에 두차례는 모두 자의반 타의반으로 외국 유랑생활을 할 수 밖에 없는상황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 두 차례의 외유기간이 선진문물을 보고 듣고 비공식 외교활동을 전개하는데 더 없는 기회였다고 자평하고 있다.
실제로 경부고속도로의 경우 이미 60년대 초반에 독일의 아우토반을 시속1백60㎞로 달려본 그의건의가 주효했다. 그가 65년 박정희에게 경부고속도로의 건설을 건의하자 박정희는 "나도 같은생각이었다"며 흔쾌히 받아들여 고속도로 건설이 이뤄지게 됐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에 대한 평가가 이처럼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그는 기회 있을때마다 순리의 정치를앞세우고 있지만 이는 권력에 순응하는 자신을 합리화하기 위한 명분에 지나지 않는다는 비난도많다. 항상 권력의 편에서 출세가도를 달려온 전형적인 정치인이라는 지적이다.실제로 그는 60년 4·19이후 민주당 정권하에서는 정군운동에 앞장서기도 했다. 하지만 민주당정권하에서 자신이 주도한 정군운동은 곧 실패하고 만다.
이어 그는 두차례의 투옥등을 거쳐 강제 예편돼 야인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그는 이듬해 5·16이일어나자 바로 민주당 정권을 버리고 박정희와 '반공을 국시의 제1의로 삼고'로 시작되는 혁명공약을 내놓는등 화려한 변신술을 발휘했다.
또 3당합당이후 김영삼정권에 충성을 맹세하는 모습도 그의 권력편향을 그대로 보여주는 단면이다. 내각제 합의를 파기한 김영삼 당시 민자당 대표최고위원을 비난하던 태도를 바꿔 "견마지로(犬馬之勞)를 다하겠다"고 한 것은 그의 정치스타일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일화다.또 그가 내각제를 주장하는 데 대한 순수성도 의심받는 대목중의 하나다.
우선 내각제 정부인 민주당 정권을 5·16의 희생물로 만든 장본인이 내각제개헌을 주장하는 데대한 지적이다. 그는 그러나 "당시 학생들은 판문점으로몰려 가고 경찰관까지 데모를 하면서 데모로 낮밤을 지새는 혼란의 연속이었다"며 강변하고 있다.
또 그의 내각제 주장은 권력에의 과도한 집착에서 나온 산물이라는 지적도 있다. 3당합당에서 내각제 합의를 통해 권력을 나눠가지려 했던 꿈이 무산되자 민자당을 탈당해 내각제를 재차 주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때문에 그의 내각제 주장은 민주주의의 완성을 위한 순수한 의도가 아니라권력을 향한 그의 한 방편일 뿐이라는 것이다.
물론 그가 이처럼 정치적인 재기를 거듭하게 된 것은 우리정치의 현주소와 무관하지 않다. 영·호남간의 갈등이라는 고질적인 지역구도 때문에 충청권에서 맹주로 자리잡는데 비교적 수월했던점도 부인할 수 없다. 또 정치권의 세대교체가 지지부진한 데도 원인이 있다. 하지만 그는 지금이같은 비난여론에도 35년간의 정치인생에 내각제를 무기로 마지막 큰 도박을 벌이고 있는 중이다.
〈李相坤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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