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역사와 영화사이(16)-빅터 플레밍 감독 '바람과 함께...'

1996년 울림픽이 열린 애틀랜타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무대였다. 또한 흑인운동의 대부인마틴 루터 킹의 고향이자 현대 매스컴계의 신화를 창조한 터너의 CNN본부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애틀랜타는 현대 자본주의 도시의 전형으로서 이제는 남북전쟁의 상처를 찾아볼 수 없다. 정말역사는 바람과 함께 사라졌다. 그러나 흑인 킹의 고뇌는 여전히 남아있다.

남북전쟁으로 전국이 폐허화되었어도 스칼렛은 대농장의 붉은 흙을 움켜쥐며 부르짖는다. "나에게는 아직 이것이 있다!"그런 의지와 정열의 스칼렛은 우리에게도 이상적인 여성상으로 꼽힌 적이 있다. 1990년 영화가 제작된 지 51년만에 지구 마지막으로 러시아에서 상영되었을 때 CNN 사장 터너는 "지금 러시아인에게 필요한 것은 스칼렛의 근성이다"라고 말했다. 그것은 바로 자본주의 정신이다.

그러나 미국에는 늠름한 버틀러와 아름다운 스칼렛만 있는 것이 아니다. 수백만 평의 백인 대저택과 닭집같은 흑인 슬럼가가 공존하는 오늘의 미국은 불평등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미국사람 가운데 상위 20%%의 소득규모가 전체소득의 반을 차지한다. (한국도 같다) 그것이 19세기 미국에서는 더욱 격심했다. 당시의 미국은 경제적 이해관계로 대립했다. 곧 북쪽은 풍부한 자원으로 공업이 발달하였으나 남쪽은 식민지시대부터 흑인노예를 이용한 대농장이 발달했다.영국과 프랑스에서는 이미 노예제를 폐지했으나 미국은 1850년 남부 인구의 3분의 1이 노예였다.미국의 독립선언은 '모든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평등하다'라고 했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백인전용이었다. 지금도 노예해안으로 불리는 서아프리카 바닷가에서, 17세기부터 노예들은 매년 10만명 이상이나 끌려왔다. 그 정도를 납치하기 위해서는 그 수십배의 흑인을 죽여야 했다. 미국에 끌려온 그들은 더욱 많이, 이른 나이에 죽었다. 당시의 노예들이 남긴 기록에 의하면 그들은 하루 2백번 정도의 매질을 당하고 다리에는 족쇄가 채워졌다. 노예의 반란은 끝없이 계속되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것이 1831년 터너의 반란이었다. 물론 19세기 흑인 터너와 20세기 백인터너사이에는 어떤 역사적인 고리도 없다. 20세기의 터너가 좋아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는 노예의 참혹상은커녕 아름답고 자애로운 백인에게 봉사하는 흑인들이 그려진다. 그러나 그것은 옳은 역사가 아니다.

노예제가 성행한 켄터키에서 태어난 링컨은 노예제 폐지론자가 아니었으나 연방의 통일을 위해남북전쟁을 일으켰다. 그 전쟁은 인류 역사상 가장 피비린내 나는 전쟁 중의 하나였다. 당시 주민3천만명 중에서 60만명이 죽었다. 1863년 정월 초하루 노예해방령이 선포되었으나 그것은 시작에불과했다. 4백만명에 이르는 그들은 다시 노동자가 되었을 뿐이었고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으로그들은 여전히 약자에 머물렀다.

역사는 위로부터의 해방은 지배집단의 이익이 허락하는 한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언제나 보여준다. 남북전쟁은 미국의 자본주의가 폭발적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어 19세기말에 미국은 세계의지도적인 산업국가로 발전했으나 미국에서는 여전히 흑백문제가 심각하게 남아있다. "나에게는꿈이 있다"라고 부르짖은 킹의 꿈은 아직도 멀다. 〈영남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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