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이 있다. 점을 따라 선이 움직인다. 선이 멈춰진 곳에 사람이 있다. 사람과 사람이 맞잡은 손.붓질 한번에 사람이 춤을 춘다. 사람들이 여백을 가르며 물결친다. 텅빈 공간을 향해 소리치는 사람, 서로의 어깨를 딛고 올라서 든든한 기둥을 만들어 낸 사람들, 그물처럼 얽혀 어느새 하나가되어버린 사람들. 붓끝에서 해방된 사람들의 자유로운 몸짓이 살아난다.
순백으로 가득한 화폭앞에 선 한국화가 산정(山丁) 서세옥(徐世鈺.70). "눈처럼 흰 화폭에 붓이 닿는 순간 하늘에서 떨어지는 번개가 보이고 천둥소리가 들립니다. 처음 뿌려지는 물감과 선은 번개가 내리치는 정신과 기운에 다름아닙니다. 이것이 바로 창조에 임하는 순간의 즐거움이지요"반백년의 세월동안 '사람'을 추구해온 집념을 받쳐준 것도 바로 이 즐거움이었다.산정은 대구에서 태어나(1927년) 서울대 미대를 졸업, 1949년 국전에서 최고상인 국무총리상을 받으며 화려하게 화단에 등단했으며 서울대에서 후학을 가르치다 92년 정년퇴직했다. 슬하에 2남을두었으며 장남 도호씨(34)는 조각을 전공, 화업을 잇고 있다.
산정의 50년 화업의 첫머리에는 항상 1950년대말 묵림회(墨林會)활동이 거론된다. 6.25 동란후 폐허가 되다시피 한 조국, 화단도 예외는 아니었다. "당시의 화단은 참으로 허무할 정도로 빈약했지요. 고작 두 세명이 사랑방에 앉아서 이러쿵저러쿵 하는 것이 소위 화단이었으니까요" 숨막히는폐쇄성, 우물안 개구리식의 파당싸움에 새바람을 일으키겠다며 '묵림회'를 주도한다. 당시 산정은서른을 갓 넘긴 나이었다.
1958년에 태동, 1960년에 첫 단체전을 가진 묵림회의 정신은 '대물림되는 낡은 양식에서 탈피하자'는 자유주의 정신으로 요약된다. 또 '인위적인 파당, 모든 기성의 양식은 바다로 가라'며 구시대와의 결연한 단절을 고했다.
"우선 그림의 형식에서도 낡은 전통의 파괴를 시도했습니다. 점, 선, 먹물흘리기 등 그림이 출발하는 최초의 원형에 접근했습니다"
당시 산정은 닥피지에 점과 선의 자유로운 움직임을 추구한 '점의 변주','선의 변주'등 일련의 작품을 발표했다. 산수 인물 등 전통적인 동양화 일색이던 화단에서 서화백의 작품은 파격 그 자체였다.
이같은 산정의 묵림회 활동에 대해 미술평론가들은 '전통회화 개혁의 시대정신을 반영한 현대조형으로서의 길 모색'(유홍준), '한국화의 추상표현주의 양식주도'(박정구) 등으로 평가하고 있다.한국화에 추상의 개념을 도입한 제1세대 화가로서의 지위를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수묵표현의 근원에서 새롭게 출발한 산정은 본격적으로 '사람'에 매달린다.
작가가 유독 '사람'을 천착한 이유는 무엇일까.
"작품에는 그리는 대상이 있게 마련이지만 결국 이를 표현하는 것은 사람입니다. 때문에 사람에서 출발해서 대상으로 돌아갔다가 다시 사람으로 회귀하는 것이지요. 동서양 모든 인류가 생각해온 하나의 구심점, 이야기의 초점은 사람입니다" 산정의 화두인 '사람'은 말하자면 인간정신의 구현체인 셈이다.
산정의 설명은 계속된다.
"화가의 작업은 대상의 허물을 벗겨 보는 작업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일체의 허식을 벗기고 속살까지 보는 것이지요. 모든 가식을 벗겨낸 자리에 비로소 화가는 자신의 옷을 입힙니다. 이것이 바로 화가의 창조입니다"
이렇게 창조된 산정의 작품은 흔히 전통 한국화의 진부한 고정관념을 깨면서도 동양화의 정신으로 일컬어지는 문기(文氣)를 담은 것으로 평가받는다. 그리고 여기에 표현된 절제된 정신의 바탕에는 서예와 독서가 자리잡고 있다.
산정은 폭넓은 독서가로도 유명하다. "장서가 얼추 3만권 정도 되니 정독한 책이 적어도 1만권은되겠지요" 요즘도 반드시 일주일에 한번씩은 대형서점에 가 공부하듯이 최근의 경향을 살피고 새벽 1~2시까지 책에 열중한다고 한다.
젊은 시절부터 변함없는 독서습관이다. 또 한학과 한시는 물론이거니와 서예에도 일가견이 있음은 화단 안팎에 널리 알려져 있다.
이런 노화백의 폭넓은 자양분과 독창적인 화풍 뒤에는 산정을 그림으로 이끈 서양화가 길진섭(吉鎭燮.1907~?)과 잊지 못할 스승 근원(近園) 김용준(金瑢俊.1904~1967)이 있다.산정은 책과 서화에 둘러싸여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회상한다. 부친 서장환(徐章煥)은 건국유공훈장을 받은 독립운동가로 경북의 3.1만세운동을 주도,옥고를 치렀으며 국내에서 자금을 모아 무장항일운동을 지원하기도 했다. 길화백은 산정 부친의 절친한 친구의 자제였으며 근원은 길화백의지기였다. 이런 인연으로 산정은 당대의 유명한 동.서양화가 모두를 스승으로 모시게 된다.길화백이 막연히 화가의 길을 생각하고 있는 산정에게 목탄을 쥐어 주며 데생을 가르치고 길을열어주었다면 근원은 전통 한국화의 정수가 무엇인지 가르쳐 줬다.
산정이 가장 크게 영향을 받은 스승으로 주저 않는 근원과의 일화 한가지.
어느날 청년기의 산정에게 근원이 온통 한문으로 된 두꺼운 책을 주며 다음날까지 구점(句點)을찍어오라고 숙제를 냈다. 나중에 알았지만 중국역대 그림 이론을 총망라한 책이었다. 당시만 해도한문실력이 여기까지 이르지 못했던 산정은 엄두도 못내고 하루를 넘겼다. 아니나 다를까, 다음날근원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모른다고 안하고 가만있느냐. 공부를 안 하겠다는 뜻이냐"는 질책이었다. 이날부터 산정이 한학에 정진했음은 물론이다.
그후 근원은 6.25 동란기에 월북하게 되는데 이런 이유로 산정은 드러내 놓고 스승을 스승이라칭하지도 못하는 가슴아픈 시절을 보내다 수년전 근원이 해금되자 그의 회고전을 주선하기도 했다.
산정은 개인전을 자주 안하기로도 유명하다. "국내에서 3번, 동경, 뉴욕 등 해외에서 4번 열었으니 모두 7번이군요. 너무 많이 했어요" 첫번째 개인전을 47세되던 1974년에 열었으니 이 또한 남다른 고집이다. 개인전은 작가가 충분히 성숙해서 작품세계가 자신만의 독창적인 경지를 개척했을 때만이 할수 있다는 것이 산정의 지론이다.
산정의 개인전이 열렸던 갤러리현대의 박명자(朴明子)관장은 "산정개인전을 열려고 한다 했더니운보(雲甫) 김기창(金基昶)화백께서 '산정이 개인전을 열면 내손에 장을 지지겠네'라고 말할 정도였지요"라고 전한다.
그런 산정이 최근들어 외국나들이가 잦아졌다. 지난해에 파리에서 열린 국제미술견본시장(FIAC)전에 출품했으며 올해에는 미국 뉴저지 버건뮤지엄 초대전과 스위스 바젤 아트페어에 대작을 출품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90년이후 쓴 한시를 모아 중국에서 시화집도 낼 계획이라고 한다.이달초 산정은 동아일보가 주최한 제2회 일민(一民)문화상을 수상했다. 그리고 지난해에는 50년화업을 간추린 화집도 발간했다.
"이제야 붓을 잡고 휘젓는 게 자유스러워진 느낌"이라며 지금야말로 진정한 자신만의 양식을 선보일 때가 된 듯 하다고 말하는 산정의 얼굴에서 나이를 초월한 기운이 넘쳐난다.〈金美羅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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