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망한 중국 최고 지도자 등소평이 남긴 정치적 유산은 천안문사태 무력진압으로 집약되는 독재정치와 그가 주도한 경제개혁이라고 할 수 있다.
등소평이 주도한 경제개혁은 사실상 모택동과 전세계 다른 공산정권 지도자들이 실패한 경제부문에서 성공, 중국을 부유하고 강력한 사회주의국가로 건설함으로써 권력을 유지하려는 전략의 일환이었다.
이같은 전략의 어두운 부문은 바로 반대파들에 대해서는 어떤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진압하는 독재정치였다.
중국 관영언론에 자주 등장하는 등소평의 스냅사진 2장은 등의 이같은 양면전략을 집약해 보여주고 있다.
하나는 지난 92년 경제개혁을 시작하면서 남부지방을 순회방문하는 사진이며, 다른 하나는 89년천안문사태 무력진압에 관계한 군간부들을 치하하는 장면을 담은 사진이다.
등은 79년 중국 최고지도자로 부상하기 직전 대자보로 공산당을 비판한 위경생(魏京生)등 반체제인사들에 대해 "이같은 반혁명분자들을 엄격하게 처벌해야 한다"고 말함으로써 이미 독재성향을나타냈다.
위경생은 14년수감생활뒤 95년 출옥한지 6개월만에 다시 체포돼 14년형을 선고받는 정치적 박해를 받음으로써 세계적으로 알려졌으나 이밖에도 반대파 처단에 주저하지 않는 등에 의해 희생된사람들은 무수히 많다.
등소평은 서구식 민주주의나 언론자유를 허용하는 것은 숙고하지 않은채 경제개혁과 집권체제내변화로 정치체제의 효율성을 제고할 용의가 있음을 밝혀왔을 뿐이다.
등은 80년 8월 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회에 대해 공산당과 정부를 분리할 것을 제의했으며 지도부에 대해서는 서구 정치체제를 연구해 "서방보다 월등한 중국식 민주체제를 창출하라"고 지시했다.
그는 또 "지도자가 그 자신의 후계자를 선택하는 것은 중국공산당이 타파하겠다고 약속했던 봉건체제를 영구화하는 것"이라고 밝힘으로써 중국의 개인적인 후계체제를 비판했다.그러나 등은 결국 봉건적인 외양을 조금도 떨치지 않고 사망했다. 등소평 그자신 강택민을 후계자로 지명했으며, 정치체제의 독재적 요소를 감소시키는 개혁에는 실패했다.
80년대말 유럽 공산체제가 붕괴되자 등은 반대파 탄압을 더욱 강화했으며 정치개혁에 관한 목소리는 사그러들게 했다.
분석가들은 경제개혁과 독재를 결합한 등소평의 통치스타일은 공산정권을 연장하려는 것이었으며이는 어제든지 폭발할 수 있는 압력솥과 같은 상태를 만들었다고 말한다.
정치적 다원성이 결여됨으로써 일반 국민들은 경제개혁이후 중국에 만연되고 있는 빈부격차나 부패에 저항할 수단이 없게된 것이다.
경제개혁이후 외국정보의 유입이 가능하게 되고, 독재를 유지하는데 중요한 사회적인 구조가 붕괴되면서 각 지방정부들에 대한 중앙정부의 통제능력이 약화됐다.
한 외교관은 "중국 국민들은 많은 걱정과 분노를 갖고 있다. 이것은 불안하고 예측불가능한 상황을 만들고 있다"고 말하고 "정부가 장기적인 안복을 갖고 있다면 정치적 다원성 창출을 장려해안정을 도모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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