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대구금융100년-대구은행

72년 8월3일 정부는 급격히 상승하는 물가와 환율을 안정시키고 침체일로의 경기를 회복시키기위해 사채동결과 금리인하및 기업에대한 자금지원을 주내용으로 하는 대통령긴급재정명령(8·3조치)을 공포한다.

이같은 환경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기위해 대구은행은 8월9일 임시주총을 개최,임원진을 개편하고 8월17일에는 서울지역 진출의 교두보인 서울지점을 개점했다.

서울지점 개점으로 정보의 신속한 수집과 함께 그동안 미약했던 환기능이 대폭 강화됐으며 대구지역과 연고가 있는 중앙의 자금을 적극적으로 유치,지역개발자금으로 활용할수있게된다.이에따라 창립5년만인 제10기말(72년9월말)에는 총주주수가 창립당시의 10배인 1천2백20명,자본금은 6배인 6억원,총자산규모는 22배인 2백7억원으로 늘어났다.

또 경영조직은 본부 6부2실에 14개지점,3개 예금취급소,2개 간이예금취급소로 늘어났으며 임직원수도 창립당시의 12배인 5백34명으로 증가했다.

또 예금고는 56배인 1백75억원,대출금은 1백23배인 1백1억원으로 늘어났으며 주식배당률도 6기이후 계속 14%%를 유지해 공금리수준을 상회하게됐다.

그러나 신설은행의 성장이 항상 순탄한것만은 아니었다. 73년 하반기의 석유파동으로 불황과 함께 물가가 폭등하면서 나타난 실물선호 풍조는 즉시 예금성장세 둔화로 연결됐다. 이는 72년 전년보다 89%%나 늘어났던 예금이 73년에는 35.4%%증가에 멈춘데서도 알수있다.

74년들어서는 대구경제가 극심한 침체기를 맞게된다. 70년대들어 매년 40%%이상 성장하던 대구시 수출실적이 11.1%% 성장에 그쳤으며 이로 인해 업체 가동률이 떨어지고 실업률이 증가했다.또 재고가 쌓여 섬유공업 일변도였던 지역산업구조개편논의가 무성하게 일어났다.이와함께 73년부터는 삼보,대유,동방등 각증권회사 대구지점이 개점되고 영남투자금융이 발족되는등 제2금융권이 본격 자리잡게되면서 제1금융인 대구은행이 위협을 느끼게된다. 대구은행은 이에73년 한차례,74년 세차례등 네차례의 증자로 자본금을 2년만에 6.7배나 늘리지않을수 없게된다.그러나 당시의 증자는 초창기와는 달리 은행경영이 안정궤도에 진입했기때문에 청약이 쇄도,증자자체에는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

또 지점망확충을 위해 73년7월에는 20번째 지점인 경대교지점을, 74년6월에는 30번째 지점인 안동지점을 개설하게된다. 특히 도내 5번째 지점인 안동지점개점에서 당시 김준성행장은 안동지역에서 흡수한 자금은 전액 안동권 개발에 투자할것을 다짐하면서 대구은행이 '도민의 은행'임을천명하게된다.

또 75년1월에는 당시 한일은행이 맡고있던 대구시금고를 맡아 성장에 탄력을 붙이게된다. 당시시예산은 보통예금수준의 저금리 공공예금으로 예치됐기 때문에 대구은행은 매년 엄청난 예대금리차 수입을 얻을수있었다. 또 대구시금고 취급을 계기로 도내 포항,경주등 기타지역 시군금고도대구은행이 사실상 독점하다시피 맡아 운영하게된다.

한편 74년11월에는 한일극장옆에 있던 대구소방서부지 9백26평을 본점신축부지로 선정, 매입계액을 체결했다. 이는 중구 남일동본점 입주4년이 지나면서 주차난과 비약적 성장에 따른 사무실난을 감당할수없다는 판단에서다.

그러나 대구소방서부지의 본점신축은 얼마후 백지화되고말았다. 이는 79년 대구시가 밝힌 고가도로(만경관입구-중앙주유소)건설방침이 확정될 경우 본점1층이 완전히 가려지고 설계의뢰결과 부지가 협소해 이상적 건물의 신축이 어렵다는 의견이 나왔기 때문이다. 이와함께 대구시가 만성적도심집중기능을 해소하기위해 신축본점의 외곽이전을 종용한것도 한원인으로 알려지고있다.그렇지만 도심 본점신축 좌절은 현재의 본점을 신축할수있는 계기가 됐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잘된 일로 평가되고있다.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