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님 아버님 죄송합니다…. 지영아 소영아 은영아 수영아 송주야 미안하다…. 아빠는 약했지만너희는 굳게 살아다오…. 못난 아빠, 못난 남편, 불효자'.
우리 사회의 총체적 비리구조의 단면을 드러낸 한보파문이 3개월 넘게 전국을 뒤흔들고 있는 가운데 비리 피라미드의 아래층에 섰던 박석태(朴錫台.58) 전제일은행 상무가 28일 짤막한 유서 한장을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어 충격을 던져주고 있다.
자살동기는 아직까지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지만 제일은행이 한보그룹에 거액의 부실여신을 제공하는 과정에서 실무를 담당한 데 따른 죄책감이 그를 죽음으로 몰고가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박씨의 주변 사람들은 제일은행이 한보그룹에 1조여원을 부실 대출해 준데 따른 책임을박씨가 혼자 뒤집어 쓰고 죽음이라는 극단적인 길을 선택한 것으로 여기고 이를 몹시 안타까워하고 있다.
먼저 박씨가 30여년동안 몸담아 왔던 제일은행측은 그의 자살소식에 반신반의하면서 커다란 충격에 휩싸여 있는 모습이다.
제일은행의 한 직원은 "자살이 확실하냐"고 반문한 뒤 "'몸통'들은 뻔뻔하게 대로를 활보하고 있는데 청렴하고 결백했던 그가 왜 혼자서 모든 짐을 지고 떠나야만 했는지 모르겠다"며 아쉬움을감추지 못했다.
박씨와 가깝게 지내온 다른 제일은행 직원들에 따르면 박씨는 한보사건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실무부서를 찾아가 직원들을 지휘하며 식사를 함께 시켜먹는 등 소탈한 성격의 소유자였다.이같은 박씨의 평소 품행을 반영하듯 지난 3월 한보사건의 책임을 지고 31년동안 몸바쳐 일했던제일은행을 떠날 때 동료 행원들은 "소같이 일만 하던 행원인데 빛을 보지 못했다"는 동정론을편 것으로 알려졌다.
박씨는 지난 17일 열린 한보사건 청문회에서 자신은 은행장의 지시에 따라 한보측에 대출했으며청와대로부터 외압이 있었다는 사실을 간접 시인하는 등 비교적 솔직하게 의원들의 질의에 응답,여론의 호평을 받기도 했다.
이 때문에 은행계 일각에서는 지극히 내성적이고 책임의식이 강한 박씨가 청문회 등에서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듯한 인상을 주고 청와대의 외압을 간접시인한 데 대한 심한 자책감에다검찰수사와 청문회 과정에서 죄인 취급을 받는 등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 자살한 것이 아닌가 하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박씨의 주변 인물들은 박씨가 청문회에 다녀온 뒤 사람 만나기를 꺼리는 등 극심한 우울증에 시달려왔다고 전했다.
그는 청문회 당시 제일은행의 막대한 대출배경을 묻는 의원들의 추궁에 대해 "1백억원 이상 여신은 은행장의 결심이 서야 결정된다"고 증언, 상관에게 책임을 떠넘긴다는 질책을 받는 등 '비겁한사람'으로 몰렸다.
또 신문도중 "한보대출과 관련해 수천만원의 뇌물을 받지 않았느냐" "증인의 따님이 검사가 된것으로 알고 있는데 '아버지와 검사'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등 다소 모욕적인 얘기도 들어야했다.
박씨의 미망인 김주영씨(52)는 이날 밤 박씨의 시신이 안치된 서울 삼성의료원에서 딸들이 울먹이고 있는 가운데 남편이 숨진 현실을 끝내 감당하지 못하고 통곡끝에 실신했다.김씨는 졸도전에 울분섞인 말을 내쏟았다.
"억울해…. 돈을 먹지도 않았는데 청문회에 내세워져 죄인취급을 받고…. 나라가 사람을 죽였어.어떻게 살아 왔는데…"
금융계의 한 관계자는 "한보 특혜대출 과정에서 박씨의 직위를 감안할 때 윗선에서 시키는 일을실행에 옮기는 역할을 했을 것"이라며 "그를 죽음에 빠뜨린 실제배후를 가려내야 한다"고 말했다.손봉호 서울대 교수는 "국민의 알권리를 충족시키는 올바른 제도로 청문회를 정착시키기 위해서는 수사권 부여 등 제도적 장치도 검토할 문제이지만 증인에게 인격적 모욕을 주는 발언을 피하면서 구체적 물증을 갖고 진실을 캐내려는 의원들의 노력이 시급하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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