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봉산 탈춤연구회

'이 한겹 탈속에 내 생애를 묻습니다. 상놈으로 태어난 죄라면 그 죄로 함부로 못할 이야기 탈춤에다 엮습니다'- 유병근, '탈춤'중.

대구시 서구 비산4동. 매주 월·수·목요일 해거름이면 2층으로 통한 허름한 철대문을 밀고 하나둘씩 사람들이 좁은 계단을 오른다. '봉산탈춤연구회'(256-3724). 탈춤을 추는 곳이 아니다. '탈'은벗어던졌다. 희·노·애·락, 말로는 표현 못하는 마음 속 파도까지 새하얀 한삼자락에 실어 던져버리는 곳이다. 제 신명에 겨워 온몸을 던지는 곳. '흥터'. 흥겨운 터라는 뜻에서 이곳 사람들은그렇게 부른다.

저녁 8시. 대충 10여명의 사람들이 모였다. 주섬주섬 옷을 챙기고 한삼을 손에 끼고 거울벽 앞에선다. 약방문 쓰는 진태씨는 양반탈 쓰고 양반이 되고, 교편잡는 김선생은 말뚝이 채찍을 대신 들었다. 오늘 대목은 제6과장 양반춤.

"낙양 동천 이화정-"

큐 사인. 오늘은 말뚝이 기분이 좋은가보다. 이화저엉-, 한껏 늘여뽑는 불림소리. 여유있는 장단으로 가자는 신호다. 덩-따 덩 더러러러 쿵-따 쿵따. 고의 적삼에 까만 더거리(덧옷), 좌청우홍으로잔뜩 멋부린 말뚝이. 오른손에 채찍을 높이 세우고 목청을 돋운다. "양반 나오신다아! 양반이라고하니까 노론소론 병조 옥당을 다 지내고 삼정승 육판서를 다 거친 퇴로재상으로 계신 양반인 줄알지 마시오. 개잘량이라는 양자에 개다리 소반이라는 반자 쓰는 양반 나오신단 말이오" 얼씨구,탈춤마당 한판 질펀하게 벌여볼거나. 덩-기닥 덩더러러러 쿵-기닥 쿵따. 장단에 신명이 붙고 춤판엔 흥이 돈다. 춤판은 2시간이 넘도록 양반들을 실컷 곯려주고 나서야 끝이 나고 그제서야 말뚝이, 취발이, 목중 할 것없이 우르르 창가로 달려가 빼곡이 머리를 내밀고 땀을 식힌다. 목구멍으로는 더운 숨이 가쁘게 차오르는데도 얼굴에는 땀 반, 웃음 반이 비빔밥처럼 비벼진다. 맛있다."후텁지근한 초여름 저녁바람이 얼마나 시원한지, 느껴보지 못한 사람은 모를겁니다"그 바람맛을 잊지 못하는 사람들이 모여 10여년전 처음 흥터를 열었다. 중요무형문화재 17호로서가 아니라 누구나 가까이서 즐길 수 있는 생활문화로 만들기 위해서. 봉산탈춤을 선택한 것도 오락적인 요소가 특히 강하고 황해도 봉산이라는 내륙기질이 대구와 통하기 때문이다.봉산탈춤의 매력은 무엇일까. 변화무쌍하고 화려한 춤사위, 연희자와 관객이 따로 없는 대중성으로 일찍부터 해서(海西)탈춤 중에서도 가장 인기를 모아왔다. 춤사위의 종류만도 다른 탈춤에 비해 배가 넘는다. 절도있게 관절을 꺾어주는 깨끼춤, 쓰러질 듯 말 듯 온 몸을 내던지는 고기잡이춤이 대표적이다. 봉산탈춤이 내륙적이라면 강령탈춤은 해안적이다. 꺾어지는 것이 봉산탈춤이라면 강령의 춤은 파도치는 형상이다.

또 한군데, 대구에서 춤에 미친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이 있다. 동구 신천 3동 강령탈춤연구회(754-3359)

16일 오후 8시. 5월의 더위가 만만치 않다. 벌써 연습이 시작됐다. 열채를 거머쥔 김신효 강령탈춤연구회회장의 눈빛이 진지하다. 덩-닥기 덩닥쿠쿠. 타령장단에 맞춰 슬렁슬렁 몸을 풀어본다.외사위, 겹사위. 파도치듯 팔이 어깨를 돌아치고 나간다. 외발뛰기, 모아발뛰기. 불과 10분이 지났는데 벌써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땀. 좀 쉬었으면…. 싶은데 열채는 장구 위에서 쉴 줄을 모른다.엇사위, 상좌춤. 어느새 장단은 자진 굿거리로 바뀌고 춤꾼들을 몰아 세우기 시작한다. 이어서 말뚝이춤. 강령탈춤의 백미 '말뚝이 코차기춤'이 나온다. 발이 코끝에 닿도록 힘차게 차올려 도약하는 남성의 기상을 표현해야 하는데 말처럼 쉽지가 않다. 아까부터 몸놀림이 영 신통치가 않던 숙경씨에게 불호령이 날아온다. "발 더 차올려야지!" 경력 8년째의 중고참에게도 탈춤은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땀까지 눈에 들어가 찡그리고 있는 것을 유경씨가 다가와 슬쩍 훔쳐준다. 춤판에서 뿜어져나오는 열기를 식히기에 선풍기 3대로는 역부족이었을까. 보다못한 김회장이 목중춤을 건너뛰고 느닷없이 "영감춤!"을 지시한다. 살았구나-. 저마다 오른손에 커다란 부채를 하나씩펴들고 영감이 된 회원들의 얼굴이 이제서야 펴진다. "10분간 휴식-"

"봉산탈춤이 '맛'있는 춤이라면 강령탈춤에는 '멋'이 있어요"

김신효 회장은 강령탈춤의 매력이 '멋'이라고 한다. 춤사위가 경쾌한 한삼보다는 도포자락처럼 스케일이 큰 장삼춤. 중후하고 정적인 움직임. 쉽게 관객에게 다가가는 봉산탈춤과는 또다른 매력이있다. 강사로 일하는 권태룡씨(29)는 그처럼 '끈끈한 신명'에 반해 직장까지 때려치우고 춤판에눌러앉았다.

영화나 드라마와 달리 탈춤은 현장에서 직접 보지 않고서 그 신명과 에너지를 느낄 수가 없다.문제는 그런 탈춤의 맥을 잇고 있는 사람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것. 상설강습기관은 봉산탈춤연구회, 강령탈춤연구회 두 곳 뿐이고 각 문화센터에서 비정기적으로 열리던 탈춤교실도 최근엔 뜸해졌다. 그나마 관계기관의 예산지원마저 없어 탈춤대중화의 걸림돌이 되고 있다. 대중적으로 가장많이 알려진 안동의 하회별신굿탈놀이(중요무형문화재 69호)의 경우도 사정은 마찬가지.하회별신굿탈놀이보존회(회장 임형규·44)는 5월부터 시민들을 위한 탈춤교실을 마련했으나 신청자가 한 명도 없어 문도 열어보지 못했다. 다만 매주 일요일(5월달은 목요일, 일요일)에 무료 탈춤공연을 벌이는 것으로 대신하고 있다.

파계승에 대한 풍자, 양반에 대한 풍자, 처첩사이의 갈등. 전국의 탈춤에서 일관되게 나타나는 주제에서 볼 수 있듯이 탈춤은 현실을 왜곡시키는 이념과 관료주의, 가부장적 권위에 억눌렸던 민초들이 한을 표출시키는 돌파구였다. 삶에 찌들린 우리들도 머리에는 탈을 쓰되 가슴속 탈을 벗고, 배우지 않아도 배어있는 신명나는 어깨춤으로 좋은 땀을 흠뻑 흘려보는 것이 어떨까. 이 문화유산의 해에 말이다.

〈申靑植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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