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대구금융100년(27)-동양투신(1)

80년대를 민주화 시대로 정의한다면 90년대는 지방화 시대다. 금융산업에서도 지역금융기관이 잇따라 설립되면서 지방화의 꽃을 피웠다. 대구, 대동은행에 이은 대구지역 3번째 규모의 금융기관인 동양투자신탁도 80년대말 지방화시대의 산물이다.

동양투신 설립은 지방조성 자금의 역내 환류를 촉진키 위해 87년 대통령선거 당시 제시됐던 공약으로 89년 들어서 본격 추진됐다. 동양투신 탄생에는 대구·대동은행과 마찬가지로 대구상공회의소가 산파노릇을 했다.

89년 6월 19일 강신조 전 조폐공사 사장과 이호수 당시 대우증권 상무 등으로 구성된 설립준비위원 19명이 대구상공회의소 8층에 첫 출근함으로써 동양투신 설립작업은 본궤도에 오른다.7월5일 발기인총회를 통해 강신조씨를 설립추진본부장으로 선임했다. 동양투자신탁이라는 회사명도 정했다. 납입자본금 3백억원에 출자구성을 대구경북지역 상공인 50%%,주민 50%%로 하기로했다.

신주청약을 받고보니 시민들의 청약(16대1)이 쇄도했다. 동양투신은 이 때문에 주주수가 6만8천여명에 이른다. 이로인해 현재까지도 주주총회를 대구시민회관 대강당을 빌려 열고있는 실정이다.그런데 1인당 지분한도를 1%%로 제한하다보니 회사경영의 주체가 없었다. 이에 상공인들로 하여금 출자자 조합을 구성케 하고 대구상의회장이 조합장으로 의결권을 대리 행사하는 방식으로 경영에 참여토록 했다.

11월1일 창립총회를 통해 강신조씨를 사장으로, 이호수씨를 부사장으로 선임했으며 영업을 개시했다. 비좁았지만 본점으로 대구시 중구 반월당에 있는 현대증권건물 4개층을 임대해서 11월4일이사했다.

같은달 봉덕동 지점과 서울지점,포항지점이 잇따라 문을 열었다. 출발 예감이 좋았다. 영업개시 5개월만에 3천억원, 1년만에 7천억원이라는 기대를 웃도는 수탁고를 달성했다.

92년 2월18일 강신조사장의 13대 국회의원(영양·봉화) 출마에 따라 이호수 부사장이 사장 바통을 이어받았다. 취임후 이사장은 얼핏 무모하다 싶을 정도로 강력한 조직 정비작업에 나섰다. 회사내 학연·지연·전 직장 모임 등을 일체 금지시킨것. 어길 경우 문책하고 부서 모임을 적극 장려했다. 구성원의 상당수가 다른 기관에서 이적한 사람들인 까닭에 모래알같던 회사내 분위기를일신하자는 극약처방이 아닐 수 없었다.

〈金海鎔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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