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명화의 고향-쉐르부르의 우산

"빗방울마다 첫사랑 아픔이…" 64년 제작된 프랑스 영화 쉐르부르의 우산 은 빗소리같이 가슴 적시는 첫사랑의 진한 아픔을 담담하게 담고있다.

인구 2만7천명의 프랑스 북서쪽 끝단 조그만 항구도시 쉐르부르는 수채화 같은 이 영화의 무대.카트린 드뇌브가 어머니의 우산가게에서 점원으로 일하는 18세의 즈느비예브 역을 맡았고 니노카스텔뉘오보가 20세 자동차 정비공인 기 역을 했다.

첫사랑의 연인인 기가 군에 입대, 알제리로 떠나자 즈느비예브는 기의 아기를 밴채 그를 기다리던 중 부호인 남자와 결혼해 파리로 떠나버린다. 제대한 기는 쉐르부르로 돌아오지만 즈느비예브가 없는 공간에서 방황하다 마들렌느(엘렌 파트너 분)와 결혼한다. 이후 크리스마스를 맞아 기의아이인 딸과 함께 고향에 들른 즈느비예브는 주유소를 경영하고 있는 기와 우연히 만난다. 그러나 두 연인은 뜨거웠던 사랑을 가슴에 묻은채 몇마디 안부만 물은뒤 그대로 헤어진다쉐르부르는 노르망디중에서도 코탕텡지역의 북쪽 끝단에 위치, 서방의 전략중요항으로 꼽힌다.따라서 해군기지가 있고 잠수함등을 만드는 병기창이 있다.

영화속 쉐르부르 거리에 해군병사들이 왔다갔다 하거나 술집에서 병사들이 있는 장면이 자주 나온 것도 그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상업, 낚시, 관광, 운수, 휴양 등으로도 유명해 프랑스 항구중에서 가장 활기찬 곳 중의 하나로 꼽힌다. 특히 휴양지로는 칸 다음으로 명성이 높다.

쉐르부르 중에서도 구시가지가 이 영화의 주요 배경이 됐다.

구시가지에는 바실리크 더 라 트리니테 란 교회와 테아트르(극장) 박물관 시청 등이 있어 고풍스런 분위기를 전달해 주고 있다.

즈느비예브의 어머니 역은 안느 버농이 맡았는데 영화 속의 이름 그대로 마담 에밀리 란 상호의우산가게 주인으로 등장했다.

이 우산가게는 바로 바닷가에 인접한 쉐르부르 구시가에 위치해 있는데 주소는 정확하게 13RUE DU PORT CHERBOURG 로 한국식으로는 쉐르부르 항구로 13번지 정도로 해석된다.현재 이 집은 영화를 기념해 쉐르부르의 우산들 이란 제목만을 간판으로 해 내건 채 문을 사실상 오랫동안 닫아 걸어 놓고 있다.

13번지 우산집에서 왼쪽에 바로 부두 길이 나온다. 이 항구의 부두 길은 즈느비예브가 기와 만나걸으며 사랑을 나눈 곳이기도 하고 기가 군에 간 후 부호인 롤랑 카사르(마르크 미셀분)를 만나거닐며 결혼을 결심한 장소이기도 하다. 우산 가게 남쪽으로 부두길을 따라가면 영화에 나온 투르낭 다리가 나오고 다시 왼쪽 마르 포 거리를 가다 보면 쉐르부르 사람들의 예술과 자존심을 드러내는 듯한 테아트르(극장) 가 나온다.

테아트르 드 쉐르부르 라고 이름이 붙여진 이 극장은 19세기 후반에 만들어졌으며 프랑스 큰 도시의 극장 못지않은 웅장함과 화려함을 과시하고 있다.

젊은 두 남녀의 애절한 이별의 무대가 된 쉐르부르역은 근 35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영화당시와거의 같은 모양을 유지하고 있다.

쉐르부르는 나폴레옹과도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는 도시이다.

대륙을 제패한 나폴레옹은 이곳을 기반으로 영국까지 진출하려는 큰 야심을 세웠지만 결국 영국과의 해전에서 져 그 계획은 물거품이 되는 것이다.

나폴레옹은 쉐르부르를 군사항으로 만들 것을 명령하고 실제로 그자신 1811년 여기에서 거주하기도 했다.

쉐르부르가 군사요충인 만큼 2차대전 중 연합군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주 표적이 됐다.44년 6월 연합군의 상륙작전 성공에 대한 핵심열쇠는 바로 이 곳의 신속한 장악여부로 판단됐던것이다.

연합군은 또 작전상 인공항구를 급히 만들기위해 주위에 깊은 수심을 가진 항구를 절대 필요로했다.

마침내 미군등 연합군 공수특전단은 쉐르부르를 탈환하고 독일군의 수송망에 타격을 주기 위해파리~쉐르부르간의 철도를 끊을 목적으로 투입된다.

독일군은 이곳을 방어하기 위해 완강하게 저항하지만 결국 미군 7공수연대가 쉐르부르를 탈환하게 되는 것이다.

이같은 전투를 기념하는 자유박물관 이 이곳에 있어 상륙작전 D-데이인 44년 6월6일부터 독일이 굴복한 45년 5월7일까지의 상황진전도등 전쟁 관련물들이 전시돼 있다.

쉐르부르의 우산 의 비에 대한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이 영화가 촬영되던 1963년 당시 여름 쉐르부르지역에 전례없던 심한 가뭄이 계속돼 비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곳이 되어 버렸다.

따라서 영화제작진들은 비를 만들기위해 소방호스를 동원, 물을 뿌리는 소동을 빚어 가냘픈 카트린 드뇌브는 불쌍하게도 고무호스의 물세례를 맞아야 했다는 것이다.

〈파리.李東杰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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