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시론-낭만에 대하여

박선배님, 안녕하신지요. 요즈음 정치학교수 노릇하기 정말 힘듭니다. 어지러운 정치 때문입니다.동창회에 나가면 친구들이 묻습니다. '이 나라가 도대체 어디로 가는 거냐. 정치학교수, 너 한번얘기해 봐라' 그러나 저로서는 여간 곤혹스러운 일이 아닙니다. 대답을 않고 있자니 무안하고, 대답을 하자니 궁하여, 진땀이 납니다.

그나마 몇마디를 하려고 들면 막상 질문을 한 친구들은 말을 가로막고 자기들이 먼저 떠들어댑니다. 정치학교수 체통이 말이 아닙니다. 의사하는 친구가 우리나라에는 뭘 조심해야 한다라고 건강이야기를 시작하면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며 경청을 합니다. 변호사하는 친구가 법률과 세상인심에 대해 설명을 해도 귀를 쫑긋 세우면서 조용히 듣습니다. 그런데 친구들은 정치학교수인 저 한테는 한마디 하라고 해 놓고는 저보다 목소리를 더 높이면서 제 얘기는 들을 생각도 않는답니다.하기야 그 친구들 나무랄 일은 아니지요. 이런 '음모와 배반의 정치'에 정치학교수의 분석과 전망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박선배님, 기억하시지요? 정치인의 부패를 단죄하지 않을 수 없다며국민회의 총재와 관련된 통장번호를 읽어내려 가던 굳은 얼굴. 검찰의 손으로 넘어가는가 했는데,어느날 갑자기 '역사속으로' 사라진 컴컴한 과거를 담은 봉투. 검찰 수사중단 발표후, 대통령의탈당을 요구하는 신한국당 총재의 폭탄선언.

이런 드라마같은 현상 뒤에는 항상 거대하고도 복잡한 어떤 음모의 시나리오가 도사리고 있을 것이라는 사실까지는 강호의 평론가들도 짐작할 수 있지만 그 이상이야 어떻게 알겠습니까? 누가일을 꾸몄다 아니다. 이 일로 누가 손해를 볼 것이다, 아니다. 쑥덕공론만 계속되고 있습니다.그러니 '정치에 대하여'말할 맛이 나겠습니까? 이 가을의 분위기에 어울리는 최백호의 노래말처럼, 왠지 한 곳이 비어있는 내가슴에 다시 못올 것에 대하여-'낭만에 대하여'나 이야기했으면 좋겠습니다. 박선배님, 이번 소동은 어쨌거나 돈과 정치의 유착을 소재로 일어난 것입니다. 이것을 어떻게처리하는 것이 지혜로우냐는 문제는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미묘한 것이기 때문에 논외로 하더라도 한가지 분명한 점은 우리가 돈 정치에서 한시바삐 벗어나지 못하면 민주주의는 새로운 위기에 빠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정치가 돈에 의해 휘둘리게 되면 우선 좌·우익세력들이 회심의 미소를 지을 것입니다. 민주주의란 필연적으로 비용이 많이 드는 정치제도이며, 낭비가 크기 때문에 효율적인 권위주의체제가 필요하다는 우익 수구세력의 유혹에 마음이 흔들리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민주주의란 돈많은부르주아계급이 만들어낸 허구이며, 자본주의 질서를 정당화하는 달콤한 껍데기일 뿐이다. 따라서진정한 민주주의인 프롤레타리아계급의 지배가 필요하다는 좌익세력의 말이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을지도 모릅니다.

돈이 정치에 미치는 영향을 통제하는데 우리는 쉽게 돈의 양을 제한하는 것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핵심이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돈의 투명성을 확보하는 일입니다. 정치에 드는 돈을 거두고 쓰는 과정이 양명하게 확인되면 돈 정치의 폐해는 사라질 것입니다.박선배님, 우리 정치가 돈정치, 음모와 배반의 정치가 아니라 낭만의 정치가 되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정치 투쟁과정에서 낭만이란 소극적으로는 여유와 관용, 연민 같은 것이며 적극적으로는 여러 사람들의 마음을 한곳으로 모아서 공동체적 에토스를 만들어내는 생명력같은 것입니다.오늘의 정치를 보면서 다소 뜬금없이 '낭만에 대하여'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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