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리 오너라" 호방한 일갈 들리는 듯... 황량한 겨울 들판을 가로지르며 좁은 국도를 내달으면 드물게 마주치는 미류나무 가로수 사이로심상(尋常)한 표지판 하나가 조용히 앞을 막는다.
대구에서 70리, 경북 성주읍내에서 10리길. 성주군 월항면 대산1리 한개마을.
주변 고목들과 어우러져 옹기종기 모여있는 고색창연한 기와집들을 끼고 마을 안쪽으로 뻗은 좁은 길을 오르노라면 시공을 뛰어넘어 아득한 조선시대로 되돌아간 듯, 문득 스치는 경솔한 착각조차 왠지 정겹다.
마을 앞에 큰 시내가 흐른다 해서 '한개(大浦)'로 이름붙여진 이 곳은 조선 세종때부터 대대로 성산 이씨(星山李氏)들이 모여 살아온 집성촌이자 영남지역의 숨겨진 선비촌.
고풍스런 기와집들이 짜임새있게 배치돼 있는 조선후기의 전형적인 양반촌으로 웅장하진 않지만범상치 않은 기품과 소담스러움이 공존한다.
조선 세종때 진주목사를 지낸 목사공 이우(李友)가 처음 이곳에 정착, 마을을 조성한 이후 목사공의 6대손인 월봉 이정현의 후손들이 대를 이어 살아온 전통적인 동성(同姓)부락. 50여가구 2백여명 주민의 90%% 가량이 모두 성산이씨로 촌수가 20촌이내인 일가를 이루고 있다.한개마을은 소백산맥에서 뻗어나온 영취산(325m)에 에워싸인 가운데 좌청룡, 우백호의 지세를 고스란히 갖춰 풍수학적으로도 길지(吉地)로 알려진 만큼 일찍부터 호학(好學)의 기풍이 진작돼 과거 급제자를 비롯한 인재도 많이 배출됐다고 전해진다.
지난 5월 고향 바로 알기 차원에서 한개마을을 문화사적으로 분석한 책 '경북 성주의 한개마을문화'를 펴내기도 한 대구대 이명식 교수(대구대 박물관장)도 '한개마을은 옛부터 전통을 존중해 가묘를 보존하고 삼년상을 고집하고 유가의 품위를 유지하려고 노력하는 마을'이라 적고 있다.그래서일까. 건물 하나에도 꼿꼿한 지조와 주인의 품위가 묻어난다.
솟을대문이 꽤 인상적인 북비고택(北扉古宅).
"이리 오너라" 가히 호방한 일갈(一喝)이 절로 나올 법하다. 나무와 돌, 흙과 기와가 잘 조화된1700년대 후반의 건축물로 참변을 당한 사도세자의 한과 신하의 충절이 깃들어 있다.사도세자의 목숨이 경각에 처했을때 세손을 업고 들어가 부자 상면을 시켰던 호위무관이었던 이석문(李碩文)이 영조의 미움을 사 낙향한 뒤 출입문을 북쪽으로 내고 사도세자를 추모하며 여생을보낸 건물, 북비(北扉)가 이를 말해준다. 북비란 '북쪽으로 향한 싸리문'이란 뜻.교리댁(校理宅)은 조상중 한분이 홍문관 교리를 지냈다 하여 명명됐다. 조선 영조때인 1760년에건축된 이 집은 '바'자 모양의 고가(古家)로 안채와 사랑채, 대문채, 중문채, 서재, 가묘등 6동의건물이 독립배치돼 있으며 현재 후손인 이영태씨 부부가 외롭게 고옥(古屋)의 명맥을 잇고 있다.1750년에 건축돼 고택들 중 가장 먼저 지어진 것으로 알려진 하회댁(河回宅), 집의 원형이 잘 남아있어 TV 드라마에도 간간이 등장하는 한주종택(寒洲宗宅), 1911년 건축된 주택인 월곡댁(月谷宅)은 이들 두 고택과 더불어 경북도 문화재로 지정돼 있다.
그러나 이들을 포함, 한개마을의 전체 보존상태가 양호한 것만은 아니다. 산업화와 이농에 따라곳곳에 인적끊긴 빈집과 허물어진 흙돌담장이 스산한 겨울 바람과 뒹구는 낙엽 부스러기에 노출된 채 퇴락의 징후를 알린다.
방이나 부엌을 요즘 생활방식에 맞게 일부 고친 것도 눈에 띄고 초가집은 아예 자취를 감췄으며마을 안길도 포장돼 있다. 원형 보존과 생활편의를 위한 개발논리간의 이같은 딜레마엔 전통에 대한 폭넓은 이해보다는 촬영과 답사만을 위해 이곳을 찾는 사진·건축학도, 관광객의 무턱댄 발길도 한몫하고 있다.
마을 전체가 국가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된 하회마을과 같이 한개마을을 전통민속마을로 지정받기위한 자생적인 움직임이 한때 있었지만 주민들간 이해가 엇갈려 아직 전통한옥 보존지구로 지정받진 못한 상태.
북비고택 주인 이수학씨(대구시립남부도서관장)는 "주말마다 이곳을 찾는 이유도 고향의 참 의미와 전통의 중요성을 되새길 기회를 가질 수 있기 때문"이라며 "전통에 대한 사랑이 곧 문화 사랑이란 인식이 아쉽다"고 지적한다.
흙먼지 날리던 길이 시멘트로 뒤덮일 때마다 잃어가는 것이 어찌 아련한 향수와 추억뿐일까.문화는 결코 현장(現場)에서 멀지 않다.
〈金辰洙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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