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한해는 그야말로 격동과 대변혁의 시기였다. 후반기는 대선을 통해 호남출신인 김대중후보가당선, 50년만에 여야 정권교체가 이루어졌으며 전반기는 국난인 IMF체제를 야기시킨 근인(根因)인 한보 부도사태로 인한 폭풍우가 정가를 강타한 해였다. 한해를 파노라마식으로 정리하며 정치적 의미를 되새겨 본다.
97년은 1월 21일 청와대영수회담으로 일단락되었지만 작년말 국회에서 날치기처리된 노동법파문으로 문을 열었다. 그러나 정국파란은 1월 23일 한보철강이 최종 부도처리되면서 부터다. 야권이한보특혜대출 의혹을 제기하며 여권을 궁지에 몰아 넣었다. 검찰의 수사개시로 정태수리스트에 연루된 수많은 여야 중진정치인들이 줄줄이 조사를 받았고 일부는 구속되는 등 정치권이 쑥대밭이되었다. 이로 인해 3, 4월 국정조사와 청문회정국을 만들었고 김현철씨의 비리와 국정개입을 백일하에 드러내면서 5월 17일, 대통령의 아들이 전격구속되는 사태로 발전했다.
이 사건을 통해 정경유착 등 정치권의 치부를 드러냈으며 반대로 단절의 계기도 마련했다고 볼수도 있다. 이 와중에 정치권은 대선준비에 분주하기만 했다.
3월초부터 국민회의 김대중총재가 내각제 개헌을 결심하고 김종필총재와 연대를 시작하는 모습이포착됐고 우여곡절끝에 10월 27일 양 김씨의 전격회동을 통해 후보단일화에 합의했다. 나중에 박태준의원까지 가세, DJT연대로 이어졌다.
신한국당도 3월 13일 이회창고문을 신임대표로 맞으면서 파란으로 점철된 여당 경선레이스를 출발시켰다. 다만 전당대회 직후 50%%지지율까지 보였던 그는 두 아들 병역문제로 휘청했다.이회창후보는 지지율 바닥과 후보 교체론속에서 10월 22일 김영삼대통령의 탈당을 요구한 뒤 지정기탁금제 폐지를 전격 발표하며 회심의 카드를 던졌고 곧바로 11월 13일 이회창, 조순연대에 합의하면서 지지율이 급상승했다. 그는 정가에 혜성처럼 나타나 현철씨 처리와 지난 대선자금 문제에 있어 법대로란 유행어를 남기며 여권의 1인자로 주름잡았지만 끝내 대선에서 고배를 마시고정치일선에서 물러났다.
어쨌든 이번 대선은 우려했던 돌발사태없이 평온하게 끝났다. 대선에서 여론조사 결과의 맹위,TV토론회와 TV광고 등 미디어선거의 개막, 돈 안드는 깨끗한 선거풍토 착근등 이전 대선과 전혀판이한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선진정치의 단초들이 나타났다.
올해의 최대사건은 역시 12월 18일에 있었던 대선에서 김대중후보가 이회창후보를 근소한 차이로누르고 대권을 쥔 일이다. 그러나 때마침 불어닥친 IMF한파로 정치권은 물론 나라전체가 총체적인 영향권안에 들면서 한해가 막을 내렸다. 최근 김영삼대통령은 국치의 책임을 떠맡아 치욕의 대통령으로 쓸쓸한 퇴장을 앞두고 있다.
한편 대구경북지역으로서도 대선과 맞물리면서 다사다난했다. 박태준전포철명예회장이 7월 24일포항북 보궐선거에서 재기에 성공하며 DJP연대에 참여했다. 또 9월 30일 여당사상 최초로 지방인대구에서 신한국당 전당대회(이회창후보를 새총재로 임명)가 개최되었다.
DJP연대의 반작용으로 자민련출신의 이의익의원이 11월 11일 신한국당에 입당하는 것을 계기로문희갑대구시장 등 지역정치인들이 대거 이회창후보 진영으로 옮겼다.
대선과정에서는 김윤환, 강재섭의원 등 한나라당의원들의 이회창후보진영과 박준규, 박철언의원등 자민련의원들의 김대중후보진영 그리고 이만섭전의원 등의 이인제후보진영 등 3그룹이 나눠져치열한 다툼을 벌였다. 대선 결과는 이회창후보에게 유례없는 압도적 지지를 보내면서 향후 지역의 정치적 흐름을 시사하기도 했다. 세모를 앞두고 전두환, 노태우전대통령이 석방되었고 한보사건과 선거법위반사건으로 황병태의원과 김화남의원이 의원직을 상실했다.
〈李憲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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