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신년시-길 빛 질주

판도라의 상자 같은 한 해를 여는 첫 날엔

가난한 가슴마다 위로처럼 깃드는 꿈길

우리가 떠나온 어둠의 자궁 속으로

되돌아가고 있는 이 찰나의 빛의 길 위에서

쉽게 저물지 않기 위하여

새해 첫 날마다 꿈길 하나씩 챙겨들지만

그러나 발밑의 길은 언제나 그 꿈길 비껴가고

허기진 생의 두 발 어허둥둥 떠내려가다

잠복한 허방에 발목 잡혀 곤두박질하고

그리운 나라로 가는 길을 묻는 자들의 일용할 양식은

지독한 기다림과 쓸쓸함과 외로움

참혹한 배고픔을 잊기 위하여

발밑의 길을 따라 먼지처럼 떠돌다보면

문득 가던 길 사라지고

한 해를 건너가야 하는 강둑에 주저앉아

비로소 뒤돌아본다 다시는 갈 수 없는 길

무겁거나 가벼운 길들이

심각하게 혹은 사소하게 만났다 헤어지며

생의 벽화 속에 무늬를 남기고

그 길의 표정들은 기억의 액자 속에 걸려 있다

일년치의 사막을 헤쳐온 길

언제나 돌아보면 공중에 떠 있는 길

그러나 길은 시작된 곳에서 끝나고

끝난 곳에서 다시 시작된다

어디로든 갈 수 있으나

또 아무데로도 갈 수 없는 길

길속으로 들어가 길이 되는 자에게만

자신의 비밀을 열어 보이는 길

다시 우리는 기적처럼 이렇게 살아

안개 짙은 1998년 앞에 서 있다

무심한 길들은 각각 저마다

깨달음이란 선물을 제 뒤에 감춰 놓고

오든지 말든지 맘대로 하라는 듯 침묵하며

빈손의 우리들 앞에 숨어 있다

길은 찾아 떠나는 자들의 것

길과의 치열한 연애로

1998년을 햇빛과 춤추며 건너갈 수 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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