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나의 야구인생-이만수(6)

중학교를 졸업한뒤 경북고와 대구상고를 저울질하던 나는 대구상고로 진학을 하게 됐다.부모님은 경북고를 원했지만 당시 대구상고가 경북고에 약간 밀리는 전력이어서 야구관계자들이향토 야구의 균형적 발전을 위해 대구상고를 적극 권유했기 때문이다.

내가 입학하던 해 대구상고는 장효조 김한근등 주전들이 졸업하고 2학년인 김시진 송진호가 팀의주축을 이루고 있었다.

그런데 내가 중학교를 1년 더 다녔기 때문에 중학시절 동기이던 김시진이 선배가 돼 이것 때문에한동안 애를 먹었다. 입학후 며칠뒤 운동장에서 김시진을 만나 자연스럽게 "시진아"라고 부르다 3학년 선배들에게 들켜 실신할 정도로 엄청나게 매를 맞았다. 엄격한 위계질서를 강요하던 운동 선수들에게 동기니, 나이가 같다느니 하는 것은 통하지 않아 이후 나는 김시진만 보면 "시진이 형"하며 90도로 깍듯이 인사를 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고등학교로 진학하면서 "명문 대구상고로 왔으니 뭔가 달라지지 않겠느냐"는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지만 뜻밖에도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담 뛰어넘기 훈련'이었다.

당시 대구상고는 지금 사대부고 옆에 위치했는데 도로가에 인접해 있어 훈련중 공이 담장을 넘어주택가나 도로로 나가기 일쑤였다. 떨어진 공을 기워 사용하던 시절이니 공을 되찾아 쓸수밖에 없었고 이것은 신입생들의 몫이었다.

그런데 담장이 3m나 돼 뛰어넘으려면 고도의 기술이 필요했다. 20m 정도 뒤에서 전력 질주한뒤한발로 담장을 딛고 반동을 이용해 담장 끝에 배를 걸친 다음 넘는 식이었다.

우리는 무릎이 깨져 피를 흘려가며 꼬박 10일동안 이 담뛰어넘기 관문을 통과한 다음에야 비로소야구 배트를 손에 잡을 수 있었다.

〈정리·許政勳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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