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대구 경북 발굴 여성운동 1백년

잔치나 술자리의 흥을 돋우기 위해 제도적으로 존재했던 특수한 직업여성 기생은 조선시대 이래노비와 마찬가지로 한번 기적(妓籍)에 올라가면 천민이란 신분적 굴레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그런데도 우리나라의 여명기에 기생들이 신분 차별을 뛰어넘어 나라빚을 갚는데 두팔을 걷어붙였다. 대표적인 기생들은 대구의 권번에서 활동하던 앵무(鸚鵡)·채옥·쾌연·춘옥·향선·향란등열댓명이었다.

밑바닥 인생, 기생들이 결연한 의지로 의연금 대열에 합류하자 대구 남성들이 담배를 끊어 의연금을 낸 위에 또다시 의연금을 출연하는 아름다운 풍경이 연출됐다.

이미 19세기 말엽부터 우리나라 구석구석에 침투, 경제적 외교적 능력을 마비시켜가던 일본제국은풍전등화 같은 대한제국정부에게 일본 돈으로 도로를 뚫고 수도를 넣고 금융기관을 확장하라고강요, 나라빚이 순식간에 눈덩이처럼 불어나 1천3백만원에 이르렀다.

통감부를 설치하고 '고문정치'(顧問政治)에 나선 일본제국이 우리나라 시설 개선을 빙자하여 일본인 관속에게 높은 봉급을 주며 채용, 그 비용 일체까지 우리 부담으로 돌리면서 알게 모르게 나랏돈이 새나갔다.

또 각 기구의 소요경비 부담과 통감부에 의한 교육제도의 개선을 비롯한 각종 사업에도 엄청난비용이 들었다.

1905년 6월 '세계부족'(歲計不足)을 구실로 도쿄에서 공채 2백만원을 발행케하고, 같은 시기에 '화폐정리자금'이라하여 일본 제일은행에서 3백만원을 차입케했다. 또 그해 11월에 민간금융을 위한자금이라 하여 일본 정부에서 1백50만원을 차입케하여 대한제국은 총 1천3백만원의 국채를 짊어지게 됐던 것이다. 경제학계에서는 당시 국채 1천3백만원의 단위가 원(元)이 아닌 원(圓=엔)이라는 주장을 하고 있다.

문을 닫아걸고, 평화롭게만 살던 대한제국이 자본주의체제로 강제 편입되면서 일본제국의 엄청난빚을 지게되자 민초들은 세계 시장경제 사상 유례없는 민간인 국채보상의 한 장을 펼치는 대역사를 시작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일제의 탄압과 조작에 의해 3개월만에 중단된 국채보상운동에 남정네들은 물론이요, 부인네들이 금노리개 가락지 은장도 머리뒤꽂이 목걸이 등 패물을 아낌없이뽑아냈다.

살림만 살던 여염집 부인들이 우리도 같은 백성이며 나라를 구하는데 남녀노소 차별이 있을 수없다며 패물을 뽑아서 기부하자 인생을 저당잡힌 기생들도 구국에 여남 차별은 없다는 남녀 동권의식을 키워나갔다.

이준열사는 서울에 있는 한 부인국채보상회가 연 초청강연회에서 "국채를 우리 손으로 갚기위해서는 물을 짜먹어도 기어코 우리 국권을 우리가 잡고 남녀평등을 이뤄 은혜로운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남녀가 똑같이 분투하기를 바랍니다"고 역설했다.

기생들의 국채보상운동의 첫장을 연 대구기생 앵무가 쾌척한 의연금은 무려 1백원. 앵무는 거금을수취소에 흔쾌히 던지면서 "힘에 맞게 의연금을 내는 것이 백성된 의무"라고 말했고 "누군가 1천원을 출연하면 죽기를 무릅쓰고 따라하겠다"고 선언했다.

"여자로서 누구든지 1천원을 출연하면 죽기를 무릅쓰고 따라한다 하니 기생은 참 앵무같은 기생이로고"라고 '청평논가'에 쓰여 있다.

이 책에는 앵무의 출연에 감동한 서상돈 김병순 정재학 등 남성 국채보상선구자들이 각기 기만원씩 더 출연하기로 결의, '의출남자'로 불렸다고 사학자 김도형교수는 밝힌다.

앵무가 출연한 이후 대구 권번의 기생 14명이 적게는 50전에서 많게는 10원까지 집단적으로 모금에 참여하는 정성을 보였다.

왕의 어전에 나아가 가무를 하던 최고급 기생 1패, 각 관가나 재상집에 출입하는 2패, 창기에 해당하는 3패로 등급이 나뉘어져 있던 기생들중에는 천출이지만 춤 서예 회화 문장등을 배워 교양인으로서의 자질을 갖춘 이도 적지 않았다.

진주기생 산홍(山紅)은 을사오적으로 내부대신을 지낸 이지용(李止鎔)이 첩으로 들어오라고 요구하자 "세상 사람들이 모두 대감을 매국노라 욕을 하는데 아무리 천금 돈이 귀하기로 어찌 역적의첩노릇을 하겠습니까"하며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산홍같은 의기, 앵무같은 애국심을 지닌 기생들은 성적인 수치심을 뛰어넘어 나라살리기에 동참한주인공들이다.

평양의 주희(酒姬) 31명은 "우리가 비록 천업을 하고 있지만 백성된 의무에 신분고하가 다를 수없다"고 성금 32원을 바쳤으며, 또다른 평양기생 18명도 50전씩 마련했다.

"국채보상운동에 부인·기생들이 동참, 나라살리기를 통해 평등시민사상까지 높여 나갔다"는 강세영교수(계명대 여성학대학원)는 이런 경험이 남녀차별, 신분차별철폐를 위한 자유여성운동의 밑거름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다고 들려준다.

지난해 27일 대구계산성당에서 국채보상심포지엄을 연 마백락씨(대구 효가대 부설 영남교회사연구소 부소장)는 "기생들의 애국정신이 3·1운동때 진주 수원 해주 통영 등지에서 집단적으로 만세시위를 한 항일투쟁에 많은 정신적 영향을 끼쳤다"며, 나중에는 절미·반찬줄이기· 물아껴쓰기등으로 확산, 나라빚을 갚으려는 동질의식이 남녀노소 신분차별을 초월하는 한 계기를 던져주었다고 말했다.

〈崔美和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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