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달라진 세상 새 아메리카-노인 자원봉사

시카고 부근 스프링필드에 사는 캐롤 블랙 할머니는 오후 1시가 지나면 어김없이 '세인트 존스 브레드라인'으로 향한다. 가난해 끼니를 제대로 해결하기 어려운 저소득층, 홈리스(거지) 등에게 줄식사를 준비하기 위해서다.

천주교에서 운영하는 '세인트 존스 브레드라인'은 하루 평균 5백46끼니, 연간 17만명분의 식사를무료 제공하는 자선단체. 정부의 사회복지 보조금 감소로 이곳을 찾는 사람들의 수가 해마다 증가,그만큼 일손도 달리고 있다.

여기서 매일 자원봉사하는 사람은 15명 정도. 요리, 식료품 배달, 청소 등을 모두 은퇴한 노인들이척척 해내고 있다. 17년간 양로원에서 일하다 퇴직, 지루한 시간을 보내던 블랙 할머니도 이곳에서자원봉사일을 시작하면서 "남을 돕는 보람을 느끼고 건강도 좋아졌다"며 흐뭇해하고 있다.기자가 이곳을 찾아갔을때 때마침 3백여명의 가난한 사람들이 일렬로 줄서 음식을 받아가고 있었다. 요리를 나눠주는 일을 맡은 할머니 두분과 할아버지 한분은 정답게 인사말을 건네며 맛난 음식을 이것저것 권했다. 노약자들틈에 낀 젊은이들을 보고도 두말않고 그릇 가득 요리를 담아줬다.이유를 묻지않고 음식을 나눠주는게 원칙이라고 설명한 블랙 할머니는 "돈을 벌어도 집세, 의료비등을 내고 나면 제대로 식사하기 어려운 사람들이 많다"고 했다.

한 30대 백인 남성은 기자를 보고 "사진을 찍지 말라"고 험상궂게 말해 이곳에 오는걸 창피하게생각하는듯 했다. 반면 한 30대 흑인 여성은 반쯤 먹은 음식에 머리카락이 있다며 다시 음식을 받아먹은뒤 나가면서 2-3명이 충분히 먹을만한 음식을 싸달라고 요구하는 당당함(?)을 보였다.미국에서 노인들의 자원봉사는 병원, 탁아 교육시설 등 어디서든 쉽게 볼수 있다. 55세 이상을 대상으로 자원봉사일을 알선하는 전국연장자서비스단체에 등록된 고령자 자원봉사자수는 무려 50여만명. 자원봉사가 직장에서 은퇴한 노인들의 '제2의 일터'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미국 남부 뉴올리언스에서 만난 진 베이블 할머니는 "예전에는 젊은이들이 자원봉사를 많이 했는데 요즘 젊은이들은 직장생활에 바빠 봉사활동을 할 틈이 별로 없다"며 대신 노인들의 자원봉사가활발하다고 했다. "집에 있기보다 밖에 나가 사회에 이익이 되는 봉사활동을 하는게 더 가치있다"고 말하는 이 할머니는 "뉴올리언스의 관광명물인 프렌치쿼터를 옛모습 그대로 보존하는데도 자원봉사자들의 참여운동이 큰 힘이 됐다"고 말했다.

스프링필드 '미모리얼 메디컬센터' 병원의 자원봉사자 서비스실에서 만난 줄리 덕슨 국장은 "국토가 넓은 미국은 가족과 떨어져사는 사람이 많아 이웃이 돌봐줘야한다"며 "자원봉사는 미국 문화의일부"라고 설명했다.

이곳에서 환자를 돌보고 상담, 선물 배달 등을 하는 자원봉사자는 모두 3백50명. 60~80대가 대부분으로 90세가 넘은 노인도 10명이나 된다. 의사, 대학교수, 은행장 등 전직이 화려한 사람도 많지만어느 누구도 허드렛일을 하면서 부끄러워하거나 불평하는 법이 없다.

특히 이곳에는 남성 자원봉사자가 절반으로 많은편. 은퇴후 할일이 없어 적적해하던 할아버지들이봉사활동을 하면서 친구도 사귈수 있어 지원을 많이 하고 있다고 귀뜸한 덕슨 국장은 자원봉사자들의 나이가 많아 걷기 테스트 등 건강 체크가 필수라고 했다.

이곳에서 자원봉사하는 베라 에드워드 할머니는 "오후에 잠깐씩 일하기 때문에 힘들지 않다. 여기말고 다른데서도 자원봉사를 하고 있다"며 자신이 받은 혜택을 다른사람에게 되돌려주고 싶다고말했다.

추수감사절을 전후해 열리는 '나무축제'는 이 단체가 주관하는 최대 자원봉사 행사. 무려 1천여명의 자원봉사자들이 직접 만든 크리스마스 트리.장식물 등을 팔아 양로원, 병원 등을 돕고, 참가자들이 기부한 수천개의 인형은 크리스마스날 선물을 못받는 불우 어린이들을 위해 쓰인다.자원봉사에 열심인 노인들은 특히 작은 마을에서 '모범시민'으로 꼽힌다. 범죄나 소란과 거리가 멀고 오히려 자원봉사를 하면서 은행저축, 주택구입, 세금납부 등 지역경제에 적잖은 보탬이 되기 때문.

미시시피, 아칸소, 앨라배마 등 이렇다할 수입원이 없는 남부주들은 은퇴한 노인들을 유치하기 위해 전담부서를 설치, 홍보전까지 벌이고 있다. 특히 미시시피주의 경우 연금생활자에게 소득세를면제해주고 주내 20개 마을을 '공인 은퇴자 정착촌'으로 선정, 갖가지 편의를 제공하는 등 노인 유치에 열심이다.

자신의 평생 경험을 자원봉사로 사회에 환원하는 미국의 건강한 노인들. 폭력 마약 등 골치아픈청소년문제 등에도 불구하고 미국사회가 건강을 유지하고 있는 비결은 바로 이들의 숨은 봉사가살아있기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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