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5년에 설립된 것으로 알려진 사립 대구 '달서여학교'(達西女學校)는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로 유명한 저항시인 이상화의 큰아버지 이일우(李一雨)와 세계외채보상운동의 신기원을 이룬대구국채보상운동의 최초 발기인 서상돈 등이 함께 설립했다.
대구시사 제1권 '통사'(제6편 1031쪽)에 따르면 1905년에 설립된 사립 달서여학교는 4년뒤인 1909년 9월에 정식으로 학무대신으로부터 설립인가를 받은 것으로 확인된다(1943년판 대구부사 및1973년판 대구시사 의거).
민족자본, 순수한 대구자본으로 설립된 달서여학교가 오늘날까지 그 명맥을 이어오지 못해 안타깝기 그지없다. 그러나 순수한 애국 자본에 의해 설립되고, 대구 유지부인들과 독립단체인 달성친목회 등에서 학교 운영에 도움을 아끼지않았던 달서 여학교가 근대화 초기 대구 경북 여성개화에끼친 공로는 적지않다.
이 학교의 수업현황이나 '마지막 수업'일자 등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대한매일신보'1909년12월30일자에는 "학교 설립 1년만에 생도가 50명에 달했으며 운영경비가 모자라 달성친목회에서 회관을 빌려주고 신사 여러분과 부인교육회에서 금액을 출연하여 교사를 넓히는 등 교육여건을 개선시켰다"고 적혀있다.
여성이 배워야 나라의 기초를 튼튼히 다질수 있다는 여성교육론에 입각하여 사립 대구 달서여학교를 세운 이일우와 서상돈은 어떤 인물인가.
이일우의 조부 이동진(李東珍·이상화의 할아버지, 도표 참조)은 이상화의 가계를 대구의 명문가로 발돋움하게 되는 기초를 마련한 장본인. 어려서 홀어머니 밑에서 농사일을 하면서 한문을 배워문자를 터득하고 가난한 삶을 근면으로 극복, 천석꾼의 살림을 일궜다.
이동진의 맏아들 이일우는 3천석을 하는 대지주로서 소작인들에게 가혹했던 다른 지주들과는 달리 아주 낮은 소작료를 받을 정도로 관대했다. 그는 또 '우현서루(友弦書樓)'라는 글방을 만들어많은 책을 비치해두고 각지 선비나 서생들을 모아 침식을 제공하면서 학문과 담론을 자유롭게 할수 있도록 배려했다.
"이일우는 스스로 깊은 학문을 깨우치지 못한 것을 안타깝게 생각, 달서여학교를 설립하여 부인들의 야학을 돕고 여성의 개화를 촉진하는데 조력을 아끼지 않았다"고 국문학자 이기철씨(영남대교수·시인)는 저서 '이상화'(동아일보사 펴냄)에서 밝히고 있다.
여기서 '황성신문'(皇城新聞) 1910년4월14일자 기사를 보자.
'대구에 거주하는 李一雨씨는 교육가로 저명하거니와 씨(氏)의 계수 김화수(金和秀)씨는 교육이부진함을 개탄하여 이 지역 여자교육회를 선취, 발기하여 동반입회 부인이 백여명에 이르렀고, 의연금 2백여원을 모아 달서여학교에 기부하였다. 또 서학(書學)에 종사키 어려운 청년부인을 위하여 달서학교를 임시로 빌려 야학교를 세웠는데 일순간에 부인학생들이 20여명에 달하고 이 부인들의 가정업무와 기타경비를 충당하기 위해 매우 열심이다'고 적고 있다.
사학자 박용옥씨는 국채보상운동을 주창한 서상돈.이일우 등에 의해 설립된 달서여학교는 70여 유지부인으로 조직된 부인교육회에 의하여 운영되었고 부인교육회에서는 일반부인들에게 합리적인가계경영을 교육시키기위해 부인야학회까지 설립, 부인교육운동을 폈다고 밝혔다.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펴낸 '한국근대여성운동사연구'참고)
황성신문에서는 이일우씨의 계수(동생인 이시우의 아내)가 김화수라고 밝히고 있으나 막상 이상화모친의 이름은 김신자(金愼子)이다. 김신자는 개화여성으로 부인친목회를 결성하고 여성들의 개화에 적극적으로 뛰어든 당시 대구여류사회를 이끌던 선각 여성이었다.
그럼 이 김화수와 김신자는 같은 인물인가. 또 당시 김신자가 이끈 부인친목회 활동은 어떠했으며, 달성친목회는 어떤 방법으로 대구 달서여학교를 지원했는가?
〈崔美和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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