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여성운동으로 치열한 업적을 남긴 사건의 백미는 1919년 10월 19일에 재조직된 '대한민국 애국부인회' 사건이다.
3·1운동의 격랑이 일단 가라앉은 듯한 그해 10월에 재출범한 이 회는 미국인 선교사 천미례가교장으로 있던 서울 정신여학교에 본부를 두고, 회장 김마리아·부회장 이혜경·총무 황애스더·대구지부장 유인경·영천지부장 이삼애로 조직을 짰다.
김마리아는 동지 김순애와 함께 대구에 들러 그곳에 살던 이원경(대한민국애국부인회 변론을 맡았던 김의균변호사의 부인)·이혜경·이자경·정순애·김성매·목정순등을 회원으로 확보, 순식간에 30명의 열성회원을 확보했다.
영천지부에도 지부장 이삼애 등 10여명이 동참의사를 밝혔다.
대구지부나 영천지부는 대한민국 애국부인회의 독립운동 선봉에 동참, 이 조직이 발각나서 총검거령이 내려졌을 때 유인경 대구지부장은 징역 1년을 선고받고 대구감옥에서 보냈다.이들은 독립운동의 윤활유인 군자금을 모집, 상해 임시정부에 송금하는 비밀 작업을 수행했다. 이는 곧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후원하는 활동으로 군자금은 회원들이 만든 수예품 판매 수익금으로얻어지기도 했으나 대부분 회원들의 주머니돈인 회비로 충당됐다.
항일독립정신이 미흡, 훗날 자퇴의사까지 밝혔던 오현주 등 전임 간부 대신 김마리아를 신임회장으로 선출, 제2출범의 돛을 새롭게 올린 대한민국 애국부인회는 결사부장·적십자부장 등 간부직을 신설함으로써 임시정부가 추진하던 대일독립전쟁을 원조할 수 있는 조직체로 발전시켰다.전쟁 수행에 필요한 적십자부장과 결사부장을 가동한 것은 이미 상해 임시정부에서 군관학교를설립하여 독립군을 양성하고, 부상자 구출과 치료를 목적으로 대한민국적십자사 조직이 가동된것과 궤를 같이하고 있다.
이 회는 천미례 교장사택을 비밀장소로 하고, 비밀문서를 교장실 천장에 숨겨둔 뒤 서울과 지방으로 조직을 뻗쳐 서울에서는 이화·숙명·세브란스 병원등에서 1백여명의 동지를 얻고 대구지부장 유인경은 13개 도에 조직망을 확대하여 주로 기독교 감리교파 신자를 포섭하여 군자금을 모아임정에 보낼 계획이었다.
'조직 재정비 2개월만에 백수십명의 회원을 확보, 상해 임정에 6천원의 독립자금을 송달했다'고 '조선독립운동'(김정명 지음, 도쿄 원서방 펴냄)에 적시돼 있다. 당시 6천원은 얼마나 될까. 1919년에 정미 상품 1섬(10말)이 약 45원이었으므로 6천원은 1백33섬에 해당되는데, 이 금액중에는 하와이의 호놀룰루에 있는 조선인애국부인회에서 보내온 2천원도 포함됐다.
조직을 확대하던 대한민국 애국부인회 조직은 대구에서 발각돼 12월16일, 총검거됐고 이로부터 3주일간 고문이 계속됐다.
피검된 애국부인회원중에는 간호원 등 병원관계자 29명도 포함돼 있어 당초 기독교계 여학교 교사들이 중심이 된 이 회가 독립전쟁 준비체제로 확대·재편되는 과정에서 간호원들을 대거 수용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검거된 회원들의 연령은 평균 26세 젊은 여성들로 불꽃같은 청춘을 독립운동에 불사르며 애국독립정신을 발휘했다.
당시 일제고등경찰의 한 보고서에는 "저들의 계획은 자못 대규모적이며, 조직은 잘 정돈돼 만약13도 본부와 지부가 서로 연대하여 큰 활동을 벌인다면 그 영향력은 실로 잴 수 없을 것"이라고명시, 이들의 조직력과 활동력이 어떤 남성 항일운동에 비하여도 손색이 없음을 알 수 있다.대구지부장 유인경은 대구출신으로 서울 정신여고(11회졸업)를 졸업하고 회의 조직과 지도에 능동적으로 가입한 애국여성인 동시에 대구 신명여고에서 교편도 잡은 훌륭한 교육자였다.유인경은 회장 김마리아와 함께 검거됐으나 무릎꿇고 살기보다 죽기를 자청, 끝내 사건의 전모를밝히지 않았다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여성들만의 애국모임인 이 회는 뒷날 여성해방운동과 여권신장운동의 근원으로 평가된다.〈崔美和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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