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어느 실직자의 사모곡

어머니, 오늘도 이슬비가 내렸습니다. 조금전 당신께서 살아 생전 그렇게도 아끼셨던 아이들을 당신이 누워계신 산소에 성묘를 보내고 이제 막 당신의 영정앞에 촛불을 켜고 앉았습니다. 이제는 대학생이 된 손녀가 어버이날이 돼간다고 몇달만에 집에 다니러왔기에 제 오빠랑 같이 어머니께 보냈습니다. 지난 한식날 제가 꽂아 두고온 봄꽃들이 시들었을것 같다고 했으니까 아마 싱싱한 새꽃을 안고 갔을 겁니다.

아이들은 왜 오늘 제가 같이 가지않고 저들만 보냈을까 궁금했을 겁니다. 어머니, 오늘 당신 의 묘소에 아이들과 함께 못간 것은 왠지 당신앞에 서면 울컥 눈물이 북받칠것 같아서 였습 니다. 실직한 아버지의 눈물이 행여 아이들까지 슬프게 할까 두렵기도해서입니다. 그렇잖아 도 갸날픈 당신의 손녀가 제가 실직한뒤 몰래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는 안스런 소문이 들려 와 가슴이 쓰려있는 터 입니다.

어머니, 당신이 살아 생전 자식을 위해 수없이 바친 그많은 기도도 보람없이 한창나이에 실 직자가 돼 산소에도 아이들과 함께 못가는 못난 자식의 불효를 용서하십시오. 매일 아침 갈 곳없이 텅빈 마루에 혼자 남아 주부들이 본다는 TV프로나 켰다 껐다하는 모습을 당신께서 안 보시는 것만도 제게는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어머니, 텅빈 아침, 세상밖으로 던져진듯한 외로움이 밀려 올때면 어린아이처럼 당신 이 그리워지는 마음을 어쩌지 못합니다. 한창 돈번다고 바쁘게 휘돌아 다니던 시절, 하루종 일 홀로 집 지키시며 자식 기도만 하신 어머니의 그 긴긴 외로움을 헤아리지 못했던 지난 세월이 가슴저리게 죄스러울줄 막상 제자신이 외로워지기전에는 미처 몰랐습니다. 고작 티 끌만한 실직의 외로움에도 흔들거리는 주제에 어머니의 그 길고 긴 외로움을 깨달았다는듯 하는 못난 자식의 미련함도 부디 용서하십시오. 못난 하소연같지만 홀로 걷는 등산길에서도 한창 뽀얗게 피어나는 아카시아 꽃향기조차 제겐 그저 시들하기만 합니다. 오히려 어머니의 가슴자락에 묻어나던 어린 시절의 향긋했던 체취만이 자꾸자꾸 더 그립습니다. 당신께서 살아 계시다면 아픈 속마음은 미소속에 감춰두시고 '세상살이 본디 양지 음지 돌 고도는 게 이치'라시며 어루만져 주시겠지요. 남자는 몸만 건강하면 산다며 큰누나한테 받 아 모은 용돈을 집사람 안볼때 슬쩍 집어주시기도 하시겠지요. 어머니, 지금의 저에게 아직 도 어머니가 그런 따스한 모습으로 떠오른다는 게 무척이나 행복합니다.그래서 패배자같은 모습을 보이거나 어머니를 슬프게하는 여린얘기는 더 하지 않겠습니다. 비록 못난 자식이었 지만 다른 수많은 실직자들처럼 나쁜 일로 직장을 잃은 게 아니니까 당신앞에 부끄럽지는 않습니다.

며칠전 실직자들과 노동자 학생들이 쇠파이프를 들고 길거리에 나섰다고 합니다. 어머니 저 도 그들을 이해는 합니다. 그러나 실직과 고용불안 그리고 소득상실의 불만을 저항적인 폭 력으로 분출시켜 실직하지 않은 다수계층과 전체의 이익을 해치는것은 결국 이기(利己)적 폭력일뿐 정의는 아니라 생각합니다.

환란(換亂)과 국가위기의 총체적 책임이 모두 자신에게 있다며 안방에 앉아 볼펜으로는 쉽 게 쓰면서 행동으로는 그 어떤 책임도 지지않는 위선적인 지도자에게 실직의 책임을 묻거나 불만을 던지는 하릴없는 짓거리도 않을 것입니다. 고작 77밀리의 비에 세계10대도시의 지하 철이 하수도가 돼 버리는 무능과 무책임 그리고 '혼이 담긴 시공'이 아니라 '혼이 빠진 시 공'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직장에 무사히 남아서 실직자 자리를 대신하고 있는 현실도 시비 하지 않을 것입니다. 나라만 바로 서면 모든게 다시 제자리로 다시 돌아가 서게 됩니다. 어머니, 당신의 못난 자식은 비록 실직자가 됐어도 마음과 정신은 나라가 바로 설때까지 바 르고 곧게 견딜 것입니다. 개인의 불평과 불만으로 공동체를 해치는 못난 실직자는 되지 않 을 것입니다. 그것이 때늦으나마 당신께 드릴수 있는 작은 효도의 자세라 생각됩니다. 그리 고 내년 이맘때는 아이들과 함께 당신의 묘소에 카네이션을 듬뿍 안고 갈수 있도록 열심히 일자리를 찾겠습니다. 어머니, 언제나 그리운 어머니, 하늘에서도 저희 아이들을 사랑해 주 십시오.

金 廷 吉〈비상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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