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일제치하 육영·봉사에 쏟은 단심

해방 한해전인 1944년 3월13일에 87세를 일기로 타계, 얼마전 55번째 기일을 지낸 대구 근대 여성교육의 공로자 김울산여사(대구 복명초등학교 설립자)는 대구시 북구 조야동에 쓸쓸히 묻혀있다.

전 재산과 평생을 바쳐 대구 여성 교육에 공헌한 김울산 여사는 올 봄 폐교된 대구 복명초등학교(99년쯤 대구시 수성구 범물동에 이전 재개교 예정) 교정 한켠에 세워진 석상에서만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그 흔한 일대기도, 화보도, 기념비도 하나 없다. 교육계나 여성계도 김울산 여사의 행적을 기리는 행사하나 없어 그는 철저하게 사람들의 기억 저편으로 사라졌다.

팔순을 바라보는 최진형씨(김울산여사의 조카·전 오류초등학교장) 부부가 반백년 넘게 제사를 모시고 있지만 워낙 고령이라 언제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는 형국이다.

사립에서 출발, 광복 이듬해에 공립으로 넘어가고 주변 여건에 따라 폐교됐다가 다시 문을열기를 되풀이한 대구복명초등학교를 김울산여사가 개교한 것은 지금부터 70여년전인 1926년 4월10일.

발바닥이 닳도록 조국광복을 위해 뛰어다닌 애국여성 서주원(17회 참조)이 순종황제의 대구순시(사진 참조)때 받은 하사금 2백원을 종잣돈으로 세운 사립 대구 명신여학교가 운영난에허덕이자 독지가 김울산여사가 인수, 이듬해인 1927년 11월12일 아미산(현재 천주교대구대교구 순교기념관 관덕정) 언덕 에 2층 벽돌 건물로 꿈같이 개교했다.

김울산여사가 기부한 돈은 총 8만원. 당시 80㎏ 쌀 한가마가 20원이었으니 무려 4천섬을 들인 셈이다. 학교 건축비만 3만5천원. 출연 재산의 규모가 엄청났다.

예명이 '향이'(香伊)였던 관기 김울산여사가 흥선대원군과 가깝게 지내면서 하사받은 땅이상당해 어마어마한 재산을 모을 수 있었다는 풍문이 전해지고 있다.

조선말기 통정대부 김철보의 두 딸중 장녀로 울산에서 태어난 것으로 알려진 김울산여사는16세때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와 동생을 부양하다가 어머니마저 돌아가시자 여동생을 길렀다. 어떤 사연을 겪었는지 관기가 된 김울산 여사는 정미소와 술집을 경영하면서 한 궤짝이 넘는 땅문서까지 몽땅 복명학교 유지와 지역사회를 위해 내놓았다.

복명여학교 외에 희도학교에도 1천원을 기부했으며, 어느 여름 동산동 하천(지금은 복개됨)이 범람하여 주민들이 큰 재난을 당하자 사재로 둑을 쌓고 이재민을 구제하였으며, 흉년이든 해에는 쌀 2천섬을 내놓아 구휼에 앞장서기도 했다. 생전에 사재로 나룻배를 건조하여침산 지역 주민들의 통행을 도왔으며, 비록 관기였지만 흥청망청한 생활 대신 근검 절약하여 모은 돈을 교육과 사회봉사를 위해 아낌없이 희사하는 등 그야말로 뭐같이 벌어 정승처럼 썼다고나 할까.

석상에서 풍기는 단아한 몸집과 날카로운 눈매가 범상치 않은 예인(藝人)이었음을 짐작케하는 그녀는 유아교육의 중요성을 일찍 깨닫고 복명초등학교에 병설 유치원 2개반까지 개원했다. 유치부는 민족 광복의 염원을 담아 '금강조(金剛組)' 와 '백두조(白頭組)'라 이름지었다.당시 대구 여성교육을 이끈 학교들이 대개 선교사가 세웠거나 일본인들이 자녀교육을 위해서 세운 것인데 반해 김울산여사의 복명초등학교는 명실상부한 대구여성들이 자력으로 광복열망을 담은 것이었다.

나이 70에 전재산을 학교재단에 희사한 뒤 횡정(橫町·현 대구시 중구 동산파출소 뒤편) 집에서 고고하게 여생을 정리한 김여사가 20년간 경영한 학교재산은 대지 1,270평(당시 시가12만7천원) 교사(시가 3만7천3백원, 연와조 2층 2동, 부속건물 목조와즙 3동 연건평 420평)토지(논 97필지 48,477평) 및 밭 1필지 70평(시가 3만원) 등이었다.

조선인의 생사여탈권을 틀어쥔 일제 치하를 살면서 때로는 어두운 면도 없지않지만 여성교육을 향한 한조각 붉은 마음만은 버리지 않았던 김여사의 행적이 아무리 빨리 재조명돼도결코 빠르지 않다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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