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백산맥의 한줄기가 서쪽으로 뻗어 만들어진 노령산맥. 그 경계지점에 특이한 모양의 산이있다. 마이산(馬耳山). 전북 진안군 진안읍에서 서남쪽 3Km지점, 넓게 펼쳐진 진안고원 중심부에 말의 귀 모양을 한 두개의 바위 봉우리가 눈에 들어온다. 섬진강과 금강의 분수령인마이산이다.
마치 탐스럽게 솟은 여인네의 젖가슴마냥 절묘한 모양을 하고 있는 마이산. 그 모양만큼이나 숱한 신비로운 얘기가 전해내려 온다.
바위와 자갈, 흙을 버무려 놓은 듯한 마이산은 그 자체가 신비다. 태조 이성계가 하늘로부터받았다는 몽금척(夢金尺), 이갑룡(李甲龍 본명 이춘삼) 처사(處士)가 손으로 쌓았다는 돌탑등 어느하나 예사로운게 없다.
진안읍에서 진안~전주간 국도가 연결되는 북부진입로를 통해 산에 오르면 30분도 채 걸리지않아 동쪽 숫마이산과 서쪽 암마이산이 닿은 중간점에 도착한다. 봉우리 높이는 6백60~6백70m 남짓이지만, 생김새·구성물질 등이 모두 의아스럽기만 하다. 봉우리 북쪽 경사면엔 풀과 나무가 일부 자라지만, 남쪽(마령면쪽)엔 움푹 팬 바위로만 뒤덮혔을뿐 풀한포기 보이지않는다. 이런 궁금증을 풀어주려는듯 한 등산객이 "두 봉우리는 중생대 백악기에 이뤄진 역암이고 봉우리 남쪽의 움푹팬 '타포니'는 빙하기와 한냉기의 특수한 기후조건때문에 형성됐다"고 설명해준다.
마이산 자락 은수사(銀水寺). 1978년부터 주지 혜수스님(58)이 절을 지키고 있다. 스님은 마이산의 신비를 캐기 시작한지 10여년만에 조선왕조 개국과 마이산의 연관성을 밝혀냈다. 태조의 '몽금척'이야기와 궁중무용 '금척무(金尺舞)', '마이산신제'를 복원한 것이다.고려말 청년 이성계는 명산대천을 다니며 수양하고 기도드리던 어느날 말의 귀와 같은 영봉에서 신인(神人)이 금으로 된 자(金尺)를 주며 삼한의 강토를 재라고 하는 꿈을 꾼다. 그후왕조창업의 꿈을 간직해오던 그는 황산대첩 승리후 회군길에 진안 마이산이 꿈속에서 본 산임을 발견, 금척을 묶어놓은 산이란 뜻의 '속금산(束金山)'이라 이름지었다. 조선개국뒤 왕조창업의 필연성을 예술적으로 표현한 금척무는 궁중무용으로 정착됐다. 특히 금척무는 지난 2월25일 김대중 대통령 취임식때 전북문화 대표로 선보여 조선왕조와 '국민의 정부' 출범사이 6백년의 전통을 이었다.
혜수스님은 "마이산은 동서남북으로 노령산맥-소백산맥-금남정맥-호남정맥의 정점으로, 옛선인들이 국태민안을 기원했던 신령스런 곳"이라고 했다. 1930년 일본의 문화말살정책으로궁중무용을 관장하던 '이왕직 아악부'가 해체되면서 53가지 궁중무의 으뜸이던 금척무도 사라졌다. 스님은 이왕직 아악부의 마지막 생존자 김천흥 선생(궁중무형문화재 제1호) 등의 도움을 받아 금척무를 발굴했다. 지난 84년부터 '진안군민의 날'로 지정된 10월12일에는 마이산 금척무가 재현되고, 전야제로 '마이산신제'가 열린다. 이날은 태종 13년 왕이 직접 마이산으로 남행, 산제를 올리고 산신에게 계룡천도를 물어 민심의 동요를 막은 날로 전해오기때문. 은수사에는 '몽금척도'와 '금척'의 복제품, 음양오행을 묘사한 '일월도'가 소장돼 있다.
은수사 아래엔 마이산을 대표하는 또다른 '인공의 신비'가 자리잡고 있다. 자연석을 사용해정교하게 쌓아올린 90여기의 돌탑들. 폭풍이 몰아쳐도 흔들리기는 하나 무너지지 않는다는신비를 간직했다. 1890년쯤 이갑룡 처사가 30여년동안 쌓았다는 이 걸작들은 탑사(塔寺) 뒤편 높이 솟은 쌍탑(천지탑)을 비롯해 주위에 빼곡이 들어서 있다. 이갑룡 처사의 증손자 재동씨(33)는 "할아버지는 19세때 부모를 여읜 뒤 흰옷을 입고 전국 명산대천을 순례하며 유·불·선의 도를 닦은 수도자"라고 말했다. 이 처사는 전국순례뒤 농사를 짓기위해 고향인임실군으로 돌아오는 길에 명산인 마이산에 도착했다. 꿈속에서 억조창생을 위한 기도를 하라는 계시를 받은 이 처사는 이곳에서 각지의 정기가 서린 돌을 모아 손수 탑을 쌓고, 숫마이산 화암굴에서 수도를 하며 정착했다는게 재동씨의 설명이다.
마이산 돌탑은 이갑룡 처사가 직접 쌓았다는게 정설이지만, 일부 향토연구가들은 또다른 흥미로운 학설을 제기하고 있다. 고려 풍수설을 기초로, 마이산 천지탑이 이갑룡처사 이전에조탑됐다는 주장. 고려 도참사상에 의하면 마이산에서 발원한 금강의 모양이 영동·옥천을거쳐 대전을 감돌아 공주·부여를 통해 군산앞바다로 나가는 '반궁수(反弓水:강모양이 개경을 향해 활시위를 당기는 모양)'라는 것. 실제 고려 왕건의 훈요십조에는 '금강아래쪽(호남)지방은 산형지세가 반역의 형세이므로 벼슬자리를 쓰지말라'는 요지의 글이 담겼다. 금강이활이라면, 마이산에서 시작해 운장산-대둔산-계룡산으로 이어지는 산맥은 화살이 된다. 즉마이산은 화살 손잡이가 되고, 계룡산은 화살촉에 해당한다. 따라서 화살 손잡이를 돌탑으로묶어둠으로써 한양이나 개경으로 향한 반역의 화살을 꺾으려는 왕조의 조치가 바로 천지탑이라는게 최규영 진안문화원 회원의 가설. 이때문에 현재 최씨 등의 이론을 받아들인 진안군과 이갑룡 처사 후손들간에 천지탑 소유권을 둘러싼 소송이 진행중이다.
마이산은 호남의병 창의지로도 전해진다. 1907년 구한말 유학자 이석용(李錫庸) 선생이 일본침략에 맞서 의병거사 궐기대회를 개최한 곳이다.
반역의 땅이든, 우국의 땅이든 수많은 신비가 얽혀 있는 마이산은 보는이의 가슴을 저미게하는 외경스러움이 서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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