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수립당시 대구의 인구는 고작 30만명을 오르내리는데 불과했다. 해방이후 밀려온 귀환민과 농촌이주 인구로 시가지 도로는 기존의 농촌도로가 개수되지 않은 상태에서 미로를 형성하고 있었다.
정치성향이 강한 대구·경북지역의 특성에 걸맞게 대중당과 대동민주당등 서울과 관련이 없는 지역독자적인 정당이 창당됐으며 46년말기준 경북도내에서는(본사는 모두 대구)16종의신문과 21종의 월간잡지가 간행됐다. 남조선총파업이 도화선이 된 10·1 폭동사건을 거쳐정부수립까지 대구·경북지역에서도 여타지역과 마찬가지로 우익진영의 체제정비와 좌익의저항이 거세게 일어났다.
◆50~60년대
50년 6·25전쟁이후 피란민의 행렬로 대구인구는 40만명을 육박, 좁은 도로를 더욱 복잡하게했다. 그러나 피란민의 행렬과 35일간의 임시수도 역할은 대구의 산업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전국토의 70%가 전쟁의 참화를 입었으나 대구는 직접피해를 입지않은 덕에 전쟁중 병참기지역할을 맡게됐다. 특히 해방전부터 대구산업의 주류를 이루던 섬유직물업은 비약적인성장의 계기를 마련하게된다.
54년에는 제일모직이 등장했으며 나일론사를 한국에 소개한 코오롱그룹 창업주 이원만씨가대구 신천동에 한국나일론을 설립했다.
대구매일신문에 대한 백주의 테러가 자행된것은 55년9월14일. '학도를 정치도구로 이용하지말라' 라는 신문사설에 불만을 품은 폭도들이 신문사를 습격, 인쇄시설과 신문을 탈취한 것이었다. 우리 언론사에 획을 그은 이사건은 언론의 사명과 역할이 무엇인가를 일깨워준 계기가 됐다.
57년에는 가짜 이강석이 경주경찰서장의 극진한 대접을 받고 다시 대구에 들렀다가 경북지사에게 들통이 난 사건이 터져 자유당 말기의 폐해를 여실히 드러냈다.
적산건물이 많아 피란민수용처로 활용되던 지역에 교동시장이 등장한것도 50년대. 군용물자의 유출품과 밀수품이 주거래되는 통에 양키시장으로 더 알려졌다.
대구의 팽창은 경제제일주의와 개발붐이 일던 60년대 이후부터 시작된다. 60년도에 67만여명이던 대구인구는 꾸준히 증가, 70년에 드디어 1백만명을 넘어서게 된다.
인구의 증가에 따른 각종 도로와 건설붐도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일어나 지역건설업계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AID차관을 도입해 불도저등 중기를 구입하기도했다. 66년의 동대구역신축기공식은 대구를 온통 충격으로 몰아넣었으며 역앞에는 대구 최초의 고가도로가 놓였다.
건축붐으로 '대구에는 고층건물이 필요없다'던 고정관념이 깨졌다. 대구대학 연구동은 지역처음의 10층이상 건물. 일반건물로는 69년 일부 준공을 본 대구백화점 건물이 10층을 넘어섰다. 60년대말 동대구역 업무개시와 함께 동서관통도로가 확장신설됐으며 66년 경북도청청사가 현 경상감영공원에서 산격동으로 이전함에 따라 통일로가 개설됐다.
그러나 50년대말까지 국제적 공업도시로서의 지위를 얻은 대구는 60년대이후 그 자리를 넘겨주게된다. 직물공업의 전국섬유산업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상대적으로 저하됐다. 서울, 부산이 부가가치가 높은 봉제공업을 차지하고 섬유소재공장이 다른지역에 집중 건설되면서 대구섬유의 질적성장은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다.
67년 대구은행이 창립됐으며 식수난을 해결하기위한 낙동강상수도 신설사업의 기공식이 66년 치러졌다. 경북실내체육관도 60년대 작품. 대구의 항공사업도 61년 시작됐다. 부산비행장대구출장소로 출발한 대구공항은 61년 4월 대구~서울간 소형여객기를 취항, 민간항공수송을맡게됐다.
58년 대구시로 편입된 지역중 동변동과 서변동및 파동을 제외한 나머지지역이 62년 다시 달성군으로 환원되기도했다.
60년대 지역의 최대사건은 울진·삼척지구 무장공비출현. 무장공비 1백여명의 출현은 68년겨울을 한껏 얼어붙게했다.
◆70~80년대
70년대의 경부고속도로 건설은 대구를 여러모로 달라지게했다. 전국의 직물도매기능을 담당하던 서문시장은 서울 동대문시장에 그 자리를 빼앗겼으며 대구의 수출은 상대적으로 둔화돼 타도시에 비해 경제력이 낮아졌다.
게다가 중동특수라는 기회를 맞아 서울지역의 건설업계가 도약하고있을때 지역 건설업계는주택분야로 구조가 편중되는 취약성을 드러냈다. 대구~마산을 잇는 구마고속도로가 76~77년건설됐으며 73년에 놓인 신암동수협앞 신암육교와 신암국교앞 대현육교로 대구에도 육교가등장했다.
71년부터 조성되기 시작한 구미공단에서는 전자·섬유제품이 쏟아져 나왔으며 73년 7월3일포항종합제철공장이 준공됐다. 76년10월에는 울릉도 대화태장에서 고기를 잡던 어부 3백17명이 사망하는 대형조난사고가 발생했다.
80년대들어 대구 서비스산업의 이상비대화 현상은 사회문제로까지 번졌다. 비대화된 3차산업중 금융, 보험, 정보, 무역서비스기능은 취약한 대신 소비성산업의 호황만 이어졌다.유통업에서도 재래시장의 쇠퇴가 두드러진 대신 백화점등 현대식 소매기구가 발달됐으며 89년 비운의 대동은행이 중소기업전담은행이란 기치를 내걸고 설립됐다.
부동산경기의 과열현상이 빚어진 80년대들어 각종 레저시설과 오피스텔이 대구에도 속속 건립됐다. 활황경기를 타고 지역건설업계도 성장세를 타 건설업이 지역주요 산업으로 등장했다. 81년5월 경산군고산면매호2동앞 경부선 건널목에서 일어난 열차추돌사건은 54명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90년대
90년대이후 대구·경북의 최대화두는 경제성장. 섬유일변도의 산업구조 변화가 여전히 지역의 과제로 남아있는가운데 위천공단지정문제가 핫이슈가 되기도했다.
90년대에 전국적으로 이어진 대형사고에서 대구·경북지역도 예외가 아니었다. 낙동강 페놀오염사고에서부터 성서 개구리소년 실종사건이 90년대 벽두를 어수선하게 했으며 낙동강 수질오염사고는 식수에 대한 두려움을 안겨주었다. 상인동 도시가스폭발사고로 수많은 인명이목숨을 잃었으며 94년에는 사상최고의 찜통더위가 7~8월 두달간 지역을 가마솥으로 달군 가운데 들판이 갈라지는 가뭄까지 겹치기도했다.
90년대들어 대구·경북의 정치적 소외감이 커져갔다. 해방이후 지역민들은 대구시가 제1의야당도시로서 차지한 전국적 위상에대한 자부심이 강했다. '모든선거의 승패가 대구시민의향배에 달렸다'고 인식할 정도였다. 선거때마다 독재정권에 제동을 거는 일은 대의를 위하고 정의를 추구하는 전통적인 사대부정신과 맥을 같이하고 있었다. 그런 정신의 발로가 바로 2·28 궐기였으며 4·19의 도화선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3공화국이 들면서 정부요직에 지역연고 인사들이 등용되기 시작하면서 차츰 여당도시로 변모, 타지역민들의 질시의 대상이 되기도했다. 그러나 타지역민들의 질시에도 불구 70년대까지는 '중앙의 무대접론'이 지역민들의 생각이었다. 5·6공화국이 이어진 80년대 지역민들의 정치적 위상에 대한 자기만족감은 극에 달했다. 그러나 90년대 들면서 만족감은 이제 더이상 대구·경북주민의 소유가 아니었다.
〈徐泳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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