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심 한복판은 자욱한 최루탄 연기로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안개지대로 변해버렸다. '일자리를 돌려달라', '더 이상은 못참겠다', '고용안정 보장하라'는 글귀가 적힌 현수막과 피켓들이 사람들 사이에서 어지러이 춤추고 있다. 거리를 메운 시위대는 이미 이성을 잃고 있었다. 경찰의 강력한 저지 때문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며칠째 거리로 뛰쳐나와 목이 터져라고함지르고 있지만 정부는 뾰족한 대안을 내놓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시위대 앞쪽에 있던 사람이 돌연 뛰쳐나오며 고함쳤다. "직장을 잃은지 1년이 넘었다. 이제는 쌀 살 돈도 없다. 더 이상 세상 살 이유도 없다. 너희들끼리 잘 먹고 잘 살아봐라" 30대후반으로 보이는 남자는 말을 마치자 마자 몸에 무언가를 끼얹고는 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였다. 이튿날 신문과 방송은 '30대 실직자 생활고 비관 분신자살'이란 제목의 기사를 내보냈다. 하지만 그 뿐이었다. 달라진 것은 없었다.
물론 앞선 내용들은 가상 시나리오에 불과하다. 하지만 대량실직시대에 있을 수 있는 한 단면임에는 틀림없다. 실업자 2백만명 시대. 외국 경제연구기관과 삼성경제연구소 등은 IMF구제금융 이후 1차 실업대란이 닥칠 즈음 이미 실업자 2백만시대를 예고했다. 미국 매킨지사는 한국 정부의 경제개혁이 미진할 경우 실업률 12%대, 실업자 2백60만명선에 이를 것이라고 경고했다. 실업자 2백만명은 '사회안정선'이 붕괴됨을 알리는 지수라는 분석도 나왔다.가상 시나리오가 현실화될 가능성이 그만큼 높다는 말이다. 전국 4가구당 1가구꼴로 실업고통에 시달리게 된다면 우리나라에서도 인도네시아 사태와 같은 민중폭동이 발생하지 말라는법은 없다.
올초부터 대량실직시대라며 떠들었지만 실제로 실직자 홍수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올초까지는 불황으로 한계상황에 이르렀던 기업들이 IMF와 정리해고 법제화를 기화로 잉여인력을내보낸 것에 불과했다. 금융권 구조조정을 필두로 이제서야 막이 오른 것이다. 곧이은 2차대기업과 공기업 구조조정은 또 얼마나 많은 실직자를 양산해낼지 모른다.
문제는 바로 여기 있다. 지금껏 실직자들은 일부 사무직 종사원들과 건설일용직이 주를 이뤄왔다. 이들은 실업자동맹을 구축해 결집된 목소리를 내기엔 다소 부족한 점이 많았다. 하지만 비슷한 처지에 있던 화이트칼라 출신 실직자들이 거리로 몰려나오면 상황은 달라진다.보다 구체적이고 체계적으로 실직의 원인과 책임을 물을 것이다. 어떤 조직보다 거대한 동시에 힘있는 조직이 바로 실업자동맹이다.
실업자 시위가 정례화(?)된 프랑스와 독일 등은 이미 정부가 실업자동맹을 정책 입안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의논상대로 여기고 있다. 실업자 시위는 결코 과격하지 않다. 물론 관공서나 호텔 등의 점거농성이 이어지지만 기물파손이나 일반인들에게 피해를 주는 일은 없다.자신들의 요구에 귀를 기울여달라는 뜻으로 농성을 벌이는 것이지 그 이상은 아니다.인정하기 싫더라도 실업자 2백만명 시대는 다가오고 있다. 정부와 기업, 노동자들의 지혜를모아 이를 막아낼 수 있다면 더 할 나위없이 다행스런 일이겠지만 전망은 그리 밝지 않다.문제는 위기를 극복하는데 있어 인도네시아로 갈 것이냐 독일이나 프랑스로 갈 것이냐 하는점이다.
노동청 실업급여 창구에서 만난 한 실직자는 이렇게 말했다.
"정부든 기업이든 희망있는 청사진을 제시하고 그만큼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준다면 참을 수있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나만 당할 순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마 모든 실직자들이같은 생각일 것입니다. 서로 책임을 지려한다면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지만 반대로 서로에게 책임을 떠넘기려한다면 결국 좌초되고 말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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