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 당비서로 선출되면서 권력 2인자로 부상되던 김일성의 친동생 김영주가 73년들어 갑작스럽게 중앙 정치무대에서 사라지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어 74년 2월13일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는 김정일(金正日)을 정치위원회(80년이후 정치국) 위원으로 선출했다.
김정일은 대외적으로는 '당과 인민의 지도자'로 발표됐고 '노동신문'은 이때부터 '당 중앙'이라는 호칭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위대한 수령님의 부르심과 당 중앙의 호소를 받들고 전당, 전국, 전민이 사회주의 대건설사업에 총동원되자"(노동신문 1974년 2월14일), 불과 32세(42년생)의 김정일이 김일성의 후계자로 공인된 것이다.
그로부터 24년만인 98년 9월, 김정일은 김일성에 이어 국가주석에 취임, '김정일시대의 개막'을 선언하게 된 것이다.
김정일이 후계자로 등장하는 70년대중반은 소위 '북한식 혁명'이 30년에 이르는 시기로 세대교체문제가 본격적으로 제기되는 시기였다. 그래서 혁명1세대인 노간부와 2세대인 기술관료의 결합을 통한 세대교체가 강력히 추진된 것이다.
김정일은 당과 군 장악에 이어 국가정보위원회를 신설, 정보·치안기관까지 장악했다. 이로부터 6년간 김일성은 후계체제에 반대하는 세력들을 제거하고 자신의 인맥을 형성하는 한편'주체사상'을 체계화하고 김일성주의를 공식화하여 부자 세습체제의 정당성을 논리적으로정립,정치적 기반을 착실히 다졌다.
1980년 10월 열린 조선노동당 제6차대회에서 그는 정치국상무위원회 상무위원과 당비서국비서 그리고 군사위원회 위원까지 겸직하면서 당내 서열 4위에 오른다. 이어 83년 4월 열린최고인민회의 제7기 제2차회의에서는 서열2위에 올라 후계자의 위치를 확고하게 굳혔다.'수령' 유일지도체제의 근간이 되고 있는 '주체사상'이 당의 유일지도사상으로 공식 선언된것은 70년 11월 열린 조선노동당 제5차대회에서였다.
그러나 '주체'의 개념이 처음 등장한 것은 55년 12월 김일성의 연설을 통해서였다."우리의 정권형태도 우리나라의 특수한 조건에 알맞게 만들어야 할 것만은 사실이다.우리나라의 역사나 조선인민의 전통도 무시하고 우리의 현실과 우리 인민의 자각정도도 생각하지 않고 다른 나라 경험을 기계적으로 받아들인다면 교조주의의 오류를 범하고 혁명운동에 커다란 손실을 가져오게 된다"
주체사상은 50년대 권력투쟁의 과정에서 반대파를 숙청하고 60년대 대소·대중 자주독립노선을 확립하는 과정에서 창출돼 67년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제4기 제15차전원회의에서 유일사상체계로 제시됐고 70년에 와서야 당의 유일지도사상으로 등장했다.
이 과정에서 김일성은 혁명전통의 계승발전과 '주체' 혁명의 대를 잇는 작업을 공식적으로그의 아들인 김정일에게 부여했다.
이 시기부터 북한사회는 사실상 김정일이 통치하기 시작한다. '김일성은 군림하고 김정일이대리통치하는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김정일의 권력 승계과정의 마지막은 군이었다. 그는 군의 '대부'격인 오진우를 87년 자기사람으로 만든 후 90년 5월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을 거쳐 91년 김일성으로부터 조선인민군최고사령관을 물려 받은데 이어 93년 4월 국방위원장에 올라 군의 통수권을 완전 장악했다.80년대가 남한의 군부 권위주의정권과의 소모적인 체제경쟁의 시기였다면 사회주의권이 붕괴되기 시작한 90년대는 이른바 '북한식 사회주의'의 위기였다. '페레스트로이카'이후 공산주의의 종주국인 구소련과 동구권국가들이 몰락하자 북한은"우리 식대로 살자"는 구호를 내세우면서 '우리식 사회주의'를 강조해왔다.
김일성의 갑작스런 사망이후 김정일은 '유훈통치'를 통해 체제위기를 극복해왔다. 이제 김정일정권은 권력 승계과정을 마무리하면서 체제 안정과 국내외적 개방외압에 맞서기 위한 '북한식 개혁'을 본격적으로 추진할 것으로 전망된다.
〈徐明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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