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이사도라 덩컨-현대무용 불 지핀 '열정·미의 화신'

1899년 어느날 저녁무렵 영국의 런던 공원 벤치. 젊고 아름다운 한 미국여성이 어머니와 함께 값싼 토마토로 허기를 채우고 있었다. 유럽에서의 첫 밤을 그렇게 꼬박 새었다.

태초에 에덴동산에서 이브가 아담에게 준 불결한 '선악과'라 하여 외면받던 이 과일을 겁없이 먹고 있던 검은 눈의 미녀. 이사도라 덩컨(1878~1927, 본명 도라 안젤라 덩컨). 그녀의 유럽에서의 첫 출발은 이처럼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가난한 아일랜드계 미국인 집안 출신. 그러나 그녀는 발레의 전통이 뿌리깊은 유럽에 혁명적인 20세기 현대무용의 바람을 일으킨다.

팔, 다리를 드러낸채 맨발과 풀어헤친 머리스타일로 자유로운 정신과 육체의 아름다움을 맘껏 발산한 이사도라의 춤은 유럽 무용계에 신선한 충격 그 자체였다. 생기없는 테크닉만 되풀이하는 현란한 발레와는 너무도 달랐다. 1900년 런던에서의 대성공을 시작으로 파리, 비엔나(1902년), 상트 페테르부르크(1905년) 공연 등 전유럽이 이사도라 열풍에 휩싸였다.

현대무용의 선구자 이사도라. 시대의 반역자이자, 자유와 미의 화신으로 군림했다. 그녀는무용가의 정신과 몸을 억압하는 기존의 형식적인 발레에 대한 반항에서 남녀평등을 향한 '신무용'이라는 혁명사상으로까지 나아갔다. '여성의 순결'로 상징되던 페티코트와 코르셋을벗어던지고 나상(裸像)의 아름다움을 활짝 드러냈다. 그녀는 "무용을 집도하는 여사제로서퇴폐한 가치관으로 병들어 찌들린 사회를 해방시키는 위대한 자유를 선언한다"고 부르짖었다.

그녀는 그리스신화의 숭배자였다. 옛날 그리스인들이 입었던 것같은 느슨한 튜닉을 걸쳤다.그리고 고대 희랍도기와 그림 등 유럽 문화유산에 나타난 형상들로부터 자연과 조화를 이룬새로운 리듬을 만들어냈다. 무용반주용 음악만을 쓰던 관습에도 반발했다. 순수음악영역인베토벤 바그너 슈베르트 등의 명곡을 무용 음악으로 사용했다. 이때문에 소송을 당하는 수난을 겪기도 했다.

그녀의 명성이 유럽을 뒤흔들자 러시아 혁명정부는 모스크바에 무용학교를 세워달라는 요청까지 했다. 그러나 그런 그녀도 '선지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고국인 미국에서는 불운을 면치못했다. 1908년, 1914년 등 미국 공연에서 '맨발의 여자' '살을 가릴 정도의 옷도 안 입은볼셰비키 화냥년'이라는 거센 비난을 받았다. 공연 금지 조치에 이어 미국시민권마저 박탈당하고 만다.

천재의 말로는 항상 비극적인 것인가. 그녀는 교통사고로 센강속에 두아이를 잃는다. 또 자유분방한 애정행각끝에 결혼한 17세 연하의 러시아 시인 세르게이 에세닌도 자살로 생을 마감하고 만다. 2년이 지난 1927년 9월 14일. 새 연인과 부가티 스포츠카를 타고 텅빈 마음을달래던 이사도라. 자신의 목에 감고 있던 긴 목도리가 차 바퀴에 끼고 만다. 그녀는 일순에질풍노도같던 생에 종지부를 찍었다. 49세였다.

무용이 '영혼의 거울'이 될수 있다는 사실을 몸으로 보여준 이사도라. 그러나 그녀의 무용은너무나 개성적·즉흥적이었다. 그때문에 다음 세대를 위한 현대무용의 체계적 방법을 마련해주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녀가 없었다면 현대무용이 그처럼 일찍 꽃필 수 있었을까. 러시아 고전 발레에 자발성과 풍부한 표현력을 불어넣은 것도, 고전발레와 현대무용을 합친 현대발레라는 새로운 무용형태가 탄생할수 있었던 것도 그녀가 있었기 때문이다.그녀의 일생은 열정과 고뇌, 투쟁으로 점철됐다. 그녀는 무용에 '새로운 형식과 생명'을 부여한 20세기 초반 예술계의 혁명을 대표하는 상징으로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되고 있다.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