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한국영화 어제와 오늘-아리랑은 24세 혁명아의 울분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고개를 날 넘겨주오' 본 제국주의의 시퍼런 칼날아래 한맺힌 한민족의 애환을 담고 전국 방방곡곡에 메아리쳤던 '아요. 남녀노소 할것없이 누구나 즐겨 불렀던 이 구슬픈 가락은 영화 '아리랑'(1926년작)의 주제가로 지금도 사랑받는 노래다.

한국영화 사상 이보다 더 나은 작품이 없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로 걸작으로 꼽히는 영화 '아리랑'. 피끓는 정열과 패기로 민족의 자주해방을 호소한 24세의 혈기왕성한 청년 나운규의 혁명정신이 담긴 한국 최초의 민족영화로 꼽힌다.

춘사 나운규(1902~1937)는 한국영화사상 빼놓을 수 없는 배우이자 감독·작가·제작자. 1924년 '운영전'이란 영화에 가마꾼 단역배우로 출연한 이후 1937년 '오몽녀'의 감독을 마지막으로 영화일생을 마치기까지 그가 온 정열을 쏟아부었던 13년간은 한국영화의 여명을 밝힌 신 새벽이었다.함북 회령 출신. 만주, 시베리아 등지를 전전하며 항일운동으로 감옥에 투옥되기까지 했던 나운규가 한국의 레지스탕스작품으로 기록되는 '아리랑'의 원작·각색·주연·감독까지 도맡은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아리랑'은 기미년 3·1독립운동에 가담했다가 일본 경찰의 잔인한 고문으로 정신이상자가 된 영진(나운규)과 일제 앞잡이 기호(주인규), 영진의 누이동생 영희(신일선) 등을 중심으로 일제 착취와 한민족의 애환을 영상화한 작품. 영희를 겁탈하려는 기호를 죽인 영진이 석양이 곱게 물든 아리랑 고개 너머로 일경에게 끌려가는 마지막 모습이 비애를 느끼게 한다.

이 영화가 당시 민족적 울분을 표현한 작품으로 대찬사를 받은 것과 달리 정작 나운규는 "졸립고하품나지 않는 템포 빠른 영화"를 만드는 것이 목표였다고 한다. 당시 우리 영화는 대인기를 끌던 서부활극 외화에 밀려 고전을 면치 못하던 때. 어린시절 고향 회령에서 듣던 철도 노동자들의노동요 '아리랑'을 테마로 엑스트라 8백명을 출연시켜 쓰라림과 유머가 있는 대작 흥행영화로 만든 것이다.

그러나 당대 최고의 스타 나운규의 전성기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한동안 침체기를 걷다 1931년 일본인 도오야마사가 제작한 '금강한(金剛恨)'에 출연, 민족영화인으로 추앙받던 명성이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되고 만 것. 그는 이 영화에 일본 여배우 오하라 오하루(小原小春)와 함께 출연,순진한 처녀들을 희롱, 유린하다 본처에게 살해되고 마는 방탕아역을 맡아 비난의 화살이 쏟아졌다.

민족영화의 선각자 나운규. 1937년 8월 9일, 숙환인 폐병으로 36년의 짧은 생을 마감한다. 영화와민족을 사랑한 고인의 정신은 국립 대전 현충원 애국지사묘역에 있는 그의 묘비에 새겨져 후손에게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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