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라는 명찰을 달고 당신 곁에서 함께 한 지도 벌써 15년이 되었습니다.
철모르던 23살의 여자와 패기만만한 젊은이였던 25살의 남자가 만나 세상을 향해 출사표를 던졌을 때만 해도 우리에겐 수많은 가능성이 눈 앞에서 반짝거렸지요.
하지만 삶의 고개를 몇 개씩 넘어온 지금은, 사는 일이 그다지 호락호락하지 만은 않다는 것을당신도 나처럼 느낄 것입니다.
결혼과 동시에 시작한 사업의 실패는 당신에게도 내게도 커다란 상처요, 고통이었습니다. 꼬물거리는 생명을 뱃속에 간직한 채 천장에 고드름이 달려 있던 겨울을 보내며 우리는 심각하게 죽음을 생각하기도 했으니까요.
그 고드름의 투명함이 서러워서 가만히 올려다보며 울었던 적도 있습니다. 끝내 부치지도 못한크리스마스 카드를 날마다 만들었던 그 해 겨울, 하지만 난 가끔씩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기도 했답니다. 그림 위에 색칠해진 물감처럼 고운 색깔이 숨쉬는 세상이 언젠가는 돌아오리라는 생각을했지요.
봄이 오고 아이가 태어나고 우리가 건너왔던 혹독한 계절의 기억들이 조금씩 바래져가고 있을 무렵, 당신은 다시 사업을 시작하려 했습니다. 묻어 두었던 아픔들이 고개를 들었지만 난 반대하지않았습니다. 어차피 버리지 못한 꿈이라면 다시 한번 더 당신을 믿고 도와 주는 것이 옳다는 결론을 내렸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도전을 시작한 지 10년.
그 동안 당신의 머리칼은 하얀색으로 변해갔고, 당당하던 청년은 그저 세상 속의 한 남자로 늙어가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애초의 꿈이 무엇이었는지조차도 희미해져 버린 세월을 보내는동안 우리들 앞으로 숨가쁘게 달려간 시간의 뒷모습을 연민의 눈으로 바라봅니다.한 번도 한눈 팔지 않고 열심히 살았던 당신에게 편안한 날들이 찾아들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지만 아직은 때가 아닌 것 같습니다.
작년 연말 엄청난 액수의 부도를 맞았고, 그걸 감당하지 못해 우리 또한 부도를 내고 말았으니까요. 우리에게 닥치는 고통은 무엇이든 다 이겨낼 수 있지만, 우리로 인해 본의 아니게 피해를 입은 사람들에게 그 어떤 해결책도 내놓지 못한다는 사실이 너무 고통스러워 죽음을 택하려 했던당신. 당신 만큼이나 나도 죽고 싶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죽음'으로 모든 것이 해결나지 않습니다. 그건, 우리를 믿어주었던 고마운 이들에 대한배신일 뿐입니다. 우리보다도 훨씬 더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은 시절이 아닙니까?
어제, 아파트 매매 계약을 하고 나서 울적해졌습니다. 시세보다 싼 값에 팔아서라도 부채를 해결하는 것이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최선임을 잘 압니다.
하지만 막상 맞닥뜨리고 나니, 걸치고 있었던 따뜻한 옷을 벗어버린 듯 추웠습니다. 우리는 지금벼랑끝에 서 있고 또 다시 고드름이 매달리는 계절이 찾아올 수도 있다는 예감을 받습니다.내가 이러할진대, 당신은 어떻겠습니까? 어깨를 누르는 책임감 때문에 당신의 삶이 참으로 고단하리라는 것, 가슴으로 느낍니다. 처음으로 장만한 집이 한순간에 날아갔다고 자책하지 마십시오.나에겐 당신이 그 어떤 멋진 집보다도 넉넉한 '집'이니까요. 내가 곁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천군만마를 얻은 듯 든든하다고 했던 당신의 말. 15년만에 처음으로 들었던 당신의 고백을 대하며내가 그리 헛살지는 않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요. 내 곁에 당신이 있어 주었듯이 나 또한 당신 곁에 있을 것입니다. 당신을 힘들게 하는 많은 일들을 하나 하나 극복해가는 모습을 지켜보면서요. 그러니 부디 힘내세요.인간은 패배하였을 때 끝나는 것이 아니라 포기했을 때 끝나는 것이라는 말, 기억하십시오.우리가 세상을 향해 던졌던 출사표는 아직 유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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