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발굴...여성운동 대구.경북 1백년(41)-경북도 무녀계(상)

과도정부가 수립되기전인 1946년 9월 미군정청이 보건후생부 내에 부녀국을 창설하여 여권신장과여성복지 증진의 계기를 마련함에 따라 경북도 부녀계가 49년1월에 개설됐다.

부녀계는 인구의 과반수인 부녀자들의 지위향상이 목적으로 한 계명사업과 부녀지도자양성, 전쟁미망인 보호사업도 펼쳤다.

대구.경북 여성정책 반세기의 기틀을 마련한 경북도 부녀계 초대 부녀계장은 달성군청 '보도'직으로 있던 김연주(金連株.한나라당 동갑 지구당 강신성일 위원장의 모친).

뛰어난 미모와 재주를 지닌 개화 여성 김연주는 남녀평등사상이 투철한데다 여성운동에 헌신적인마음자세까지 갖춰 두가지 큰 족적을 남겼다.

하나는 해방에서 6.25로 이어진 극도의 사회혼란기에 경북도내를 샅샅이 누비며 밤낮없이 생활개선운동과 문맹퇴치운동을 편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해방이후 지역 여성운동의 시조격인 대한부인회 경북도본부를 창설하는데 산파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당시 조재천 경북도지사나 김종환 경북도 대구시장과 맞대면할 수 있을 정도로 여장부였던 김연주는 화통한 성격으로 남성의 협조를 얻어가며 여성운동을 일으키려 애썼다.

이옥분.노복선.전명숙.이명득 등 당시 지역 여성계를 이끈 여자들뿐 아니라 영남서화계의 대부였던 서동진, 김종환대구시장 등 거물급 남성들과도 교제의 폭을 넓혔던 김연주는 행정안팎의 인물들을 만나 부녀운동에 대한 이해를 구하고 협조도 받아냈다.

남편과 일찍 사별하고 일제 치하에서 남성들과 경쟁하여 사회에 발을 디딘 김연주는 초대 부녀계장으로 있다가 적십자사 경북지사 서기원지사장으로부터 파격적인 대우를 제의받고 적십자사 여성담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러나 부녀계장 시절, 지금의 미도백화점 옆에서 큰 규모로 서점을 운영하다가 망하는 바람에 '제1호 산통사건'이 터져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고 대구사회에서 더이상 발붙이지 못하게 됐다.초대 김연주에 이어 제2대 엄숙희(嚴淑姬), 제3대 이자행(李資杏)을 마지막으로 경북도 부녀계는묵은 남존여비의 관습과 거센 사회풍조에 시달린채 제 구실을 다하지 못하고 개설된지 6년 3개월만인 1955년 3월 24일 폐지됐다.

하지만 사회안정과 생활개선을 위해서 부녀계몽의 필요성이 점증함에 따라 59년 10월 경북도 부녀계는 부활됐다.

이듬해 곧바로 3.15 부정선거에 이어 4.19가 터지는 사회적 혼란이 거듭되면서 또다시 부녀계가폐지(1960년 11월)되는 곡절을 겪으며 부녀행정은 그 명맥을 이어가지 못하고 1961년 5.16을 맞았다. 이때 경북도 부녀계장은 경북 대구시(직할시 분리 이전) 부녀계장이던 김도연(金道淵)이었다.5.16 이후 정치.행정.사회 분야에 안정을 기하고 경제발전이 지상목표로 대두되자 부녀행정도 새로운 출발을 시도했으나 1965년 4월이 돼서야 경북도 보사국 사회과에 부녀계가 재부활, 김도연이 계장 보직을 받았다.

개설(1949년)과 폐지(1955년), 부활(1959년)과 폐지(1960년), 재부활(1965년)로 이어진 부녀행정의명맥은 이때부터 확고한 사명감과 제도적 정비에 힘입어 점차 활성화됐다.

첫 개설 이후 15년이 지나고 뒤늦게 자리잡은 부녀계(계장 김도연)는 말단조직이 갖춰지지않아문맹퇴치.애국애족.생활개선을 확산시킬 방법이 없었다. 이때 전국에서 처음으로 독창성이 돋보이는 '부녀교실'(婦女敎室) 조직과 건전가정운동을 시작했다.

부녀행정의 저변확대를 위해 창안된 부녀교실은 '조국근대화를 위한 가정생활의 합리화'란 방향성이 보사부 역점시책으로 중앙에서 채택, 전국으로 확산되는 선진 부녀 행정으로 평가받았다.이후 부녀행정의 중요성이 점차 커짐에 따라 부녀계가 부녀아동과로 승격(1969년 4월)했다. 〈崔美和기자〉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