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년에 발족된 대한부인회 경북도본부는 해방직후 여성운동 보다는 전쟁을 치른 50년대에 구호활동과 봉사를 통한 사회참여를 이룩했다.
창설 당시 '정치 불관여'지침을 그대로 지켜나가지 못하는 바람에 중앙당 조직이 유명무실해져서60년대 한국부인회로 재발족된다.
그러나 대한부인회 경북도본부는 비교적 정치색을 덜 띠면서 군경원호와 여성계몽.불우여성 구호에 치중했는데 초대 지도부로 김선인(대구 첫 여의사, 학교법인 성광재단 이종진이사장 모친).한신덕(대성연탄 김문근 부사장 장모).노복선(유창우 장군 모친.초대 대구시부녀계장)을 선출하고 시골마을까지 순회하면서 공회당을 빌려 문맹여성들에게 한글을 가르쳤다.
가족의 절대적인 희생과 협조로 구호활동을 펴는 한편, 억울하게 빼앗겼다가 되찾은 부인회관에무료산원을 개설, 전쟁으로 위기에 몰린 월남 임산부 구호에 앞장섰다.
수없이 밀려드는 피난민과 군경의 수용 및 부상병의 치료에 고양이 손이라도 빌려야할 지경에 처하자 대구지회(지회장 이명득.민족시인 이상화의 형수)는 회원만으로 일손이 부족해서 이곳으로피난온 대한부인회원들까지 총동원됐다.
공회당(지금의 시민회관) 마당에 큰 솥을 걸어놓고 몇가마씩 보리를 볶아 미숫가루를 만들어 군장병들에게 보내어 한여름 더위에 영양보충을 시켰다. 또한 지금과는 달라서 군인들의 피복사정이 좋지않자 부인회원들은 집집마다 재봉틀을 빌려 학교 교실에 갖다놓고 매일같이 떨어진 군복을 수선하여 군인들에게 깨끗하고 단정한 옷을 갈아입혔다.
"여성운동보다 구호활동이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고 경북 대구시 제2대 부녀계장황월녀(黃月女.85.현 포항시 용흥동 거주)씨는 증언했다. 국가적 위기를 맞아 피난민 구호.부상군경 위문 및 간호.고아들에 대한 수용 구호사업에 정신이 없었고 나중에는 흰옷대신 유색옷을 입자, 반찬수를 줄이자, 화장실을 개선하자, 쌀을 절약하자는 등의 생활개선운동도 폈다.초창기 구호사업기금은 행정력을 동원, 반강제적으로 1가구당 60환씩 거둬들여서 충당, '반민반관'(半民半官)의 성격을 그대로 드러냈다.
반민반관의 성격은 행정력을 동원한 회비징수를 비롯, 행정과의 밀착성.연계성에서 두드러지는데부녀공무원들이 여성단체에서 적극적으로 뛴 점도 이를 반증한다. 당시 대구시.경북도 부녀계장을역임한 황월녀.김도연씨(전 대구시의원), 초대여자경찰서장 정복향씨가 대한부인회 대구시지부 회원으로 활동했다.
'대한부인회'회원들은 완장만 차면 어디든 출입못하는 곳이 없을 정도로 파워도 행사했다. 구호기금 마련을 명목으로 손이 모자라는 동촌 과수원에 완장을 찬 부인회원들이 들어가 사과를 따내,서울 영등포.남대문 등지로 팔러다니는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했다.
"경북도내 99개 동에 부인회 지회를 조직하고, 매주마다 대구지회내 5개지구(동구.종로구.서구.남구.북구)별로 돌아가면서 여성계몽 강연회를 가졌는데 자발적으로 3백~4백명씩 찾아올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고 타계 열흘전 고(故) 김도연씨는 증언을 남겼다.
여성계몽강연에서 "전쟁의 참화를 딛고 여성들부터 일어서서 피폐한 나라를 일으키자"면서 유관순 열사, 행주산성싸움을 들려주면 참석자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분연한 의지를 다져나갔다.그러나 성차별 관행이 숙지지않고 부녀자는 가정에 머물러야한다는 고정관념이 지배적이던 때여서 예산배정을 요구하면 "뭐하러 여성단체를 만드느냐"는 비난여론이 대구시 고위층의 입에서 터져나왔다. 여성계는 당장 대구시장을 찾아가서 "시정(市政)은 왜 펴느냐"면서 부녀조직의 필요성을 역설, 반격에 나섰다. 과격한 직언도 서슴지 않았다.
부인회관 건물은 대구시 북성로 1가 74번지에 두고, 사업관은 종로에 둘 정도로 사업규모가 방대했던 대한부인회 경북도본부이지만 한때 부인회관 소유권 문제로 홍역을 치르기도 했다.군경원호사업에 적극적인 대한부인회 경북도본부가 건물이 없어 곤란을 겪는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3사단장 이응준(전 체신부장관)의 지시로 인계받은 북성로 회관건물에 간판을 건지 얼마되지않아서 독립노동당에게 임대돼 버렸다.
남하한 전재(戰災) 임부들을 위하여 그 건물 전체를 무료산원으로 사용키로 이사회에서 결의, 준비하던중 이 일이 터지자 초비상이 걸렸다.
외국원조단체인 C.A.C에서 보내준 광목.매트리스.비누.담요류와 경북도청에서 산원수리비와 식량을 얻고, 대한부인회 경북도본부에서 의료기구와 기타 잡비를 부담키로 하고 무료산원을 준비하던터라 지도부는 관계요로를 찾아다니면서 투쟁, 결국 회관을 되찾았다.
대한부인회 경북도본부의 지회 가운데 가장 황성한 활동을 보인 대구지회(지회장 이명득)에서 활약한 여류명사로는 김성미(대한부인회 발기인) 김일조(신현확 전 국무총리 장모) 박두순(이태영전 대구대총장 모친) 이혜경(대한부인회 발기인) 김선인 김장숙(김장섭의원 동생) 노복선 이옥분(정신과 전문의 이근후박사 모친) 박옥매(학교장 부인) 이명숙(부민치과의원장 부인) 전명숙(사업가 부인) 김정조(전 호동원장 모친) 김두월(중앙병원장 부인) 남동순(현 3.1동지회 명예회장) 구문숙(전 대구일보 여상원사장 부인) 정복향(전 국회의원.초대 대구여자경찰서 초대서장) 한신덕 황월녀(미군정청 경북도공보관 박신세 부인) 등이다.
〈崔美和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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