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발굴...여성운동 대구.경북 1백년(45)

"중국에는 송미령(중국 장개석 총통의 부인), 한국에는 남미령"

해공 신익희선생이 독립군 지하조직의 중심멤버인 '7인 결사대'의 홍일점 남동순(南東順.95세)에게 붙여준 가명은 그가 조국의 독립과 여성지위향상을 위해 평생을 바쳤음을 짐작케한다.

서울시 변두리인 강북구 수유2동 우이시장에서 '처녀 회장'으로 불리며 대구 여성계에서 '잊혀진존재'로 살고 있지만 70년대 이전 대구.경북지역 여성운동사는 그를 빼고는 성립되지 않는다.

1.4 후퇴때 대구로 피난, 10여년을 대구에서 산 남동순은 지도층 여성들이 빠지기 쉬운 자기과시와 차세대 육성 외면이라는 두가지 한계에서 완전히 벗어나 지역사회와 여성을 위해 한평생을 바친 위대함을 고스란히 지녔다.

대한부인회 서울시본부(회장 한소제)의 이사에 선임됐던 그는 피난시절 대구에서 부인회원들을규합, 매일 10~12명이 교대로 임시 경무대(대통령의 관저가 대구로 피난갔기 때문)의 경찰관 4백명 식사를 줄곧 제공했다.

배타성이 강한 대구여성들이었지만 대한부인회 경북도본부 김선인지부장과 대구시지부장 이명득은 남동순을 선뜻 도본부 상임이사 겸 조직부장, 대구시지부 재정부장으로 임명했다.

"사회활동을 하면서도 절대 남을 찍지않고(험담하지 않고) 순수하게 일한 대한부인회 대구시지부장 이명득씨와 같은 여성이 두어명만 있으면 나라가 잘될 것"이라고 남씨는 회고한다.

대한부인회 경북도본부와 대구시지부가 세(勢)확장을 둘러싸고 갈등양상을 보이자 "진시황도 죽고, 이박사(이승만)도 죽는다. 흙으로 돌아갈 인생, 후하게 살자"며 순수한 화합을 강조하던 남동순은 "사람은 사람이 키우지 호랑이가 키우지 않는다"는 지론을 지키며 여성 후배를 키워나갔다.

대한부인회 조직과 재정부장을 맡으면서 단체의 예산이 없으면 서슴지 않고 유산으로 물려받은 5백석 재산을 사회와 국가를 위해서 다 내놓고 지금은 초라한(?) 모습으로 살고 있는 남동순은 9일 기자에게 "조금도 후회하지 않는다"며 당당하게 말했다.

대한부인회에 몸담으면서 피난기 대구에서 모윤숙을 단장으로 결성된 대한여자청년단 경북도단의군경원호부장까지 맡아 1인3역을 감당했다.

군경원호부장시절, 이형균대장이 "군인들이 병들어서 시름하고 있으니 뭔가 좀해달라"는 부탁을받고 전국을 돌며 위문에 나섰고, 군입대를 기피하는 풍조를 막기위해 지방 순회 강연을 계속했다.

"아들을 골방에 숨겨놓지 말고 군에 보내주세요. 미군이 우리나라에 와서 전쟁을 치러주는데 공짜가 아닙니다. 우리 땅내주고, 터내주고, 돈도 내야합니다. 장교들한테 와이로(뒷돈) 써봐도 허사입니다"라면서 국방의 의무를 지키도록 일깨우면서 여자와 어린이를 괄시하는 풍조를 고치려고애썼다.

남성 대상 강연에서는 "여성을 존중하고 어린이를 잘 기르는 나라라야 풍성하게 발전한다"면서사회적 약자들의 인권이 존중되도록 유도했고 여성 대상 강연에서는 "소금은 물에 녹고, 남자들은 여자들의 치마폭에서 녹는다. 여성들이 잘해야 남편의 귀가가 빨라지고, 참정권도 획득할 수있다"고 조리에 맞는 말을 하면 박수가 끊이지 않았다.

남동순은 일본사람은 나라생각이라면 끔찍할 정도인데 반해 우리나라는 수준미달인 현실을 개탄,태극기 3만개를 만들어 대한부인회 경북도본부.대구시지부.대한여자청년단을 통해 국기보급운동을펼치면서 나라사랑 정신을 북돋웠다.

"나라에는 기본이 있어야한다"고 주장하던 남동순은 나라를 위해 몸을 아끼지 않은 상이군경들의자립자활을 위해 수성못에서 합동결혼식(50쌍)을 치러주었고, 처녀 5명을 최초로 여군에 입대시켰다.

"조선시대에 낫놓고 ㄱ자도 모르던 부녀자들도 행주치마에 돌을 날라다가 왜군을 무찌르는데 일익을 담당했는데 오늘날 남녀동권 시대에 남자들에게만 국방을 맡겨서는 안된다"고 주장하던 남동순은 1975년에 발대식을 가진 여자예비군의 창설주역으로 아직도 한국부인회 명예회장을 맡고있다.

〈崔美和기자〉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