栗谷(율곡)이 태어난 강릉 오죽헌에서 동쪽으로 1.5km 난설헌(蘭雪軒)의 생가인 초당에서 서북쪽으로 2km 지점에 조선후기 사대부의 전형적 저택 양식을 간직한 선교장((船橋莊)이 있다.경포호변에 위치한 선교장 주변은 경포호 둘레가 지금의 4km보다 훨씬 넓던 시절 배를 타야만건너 다닐수 있었다해서 '배다리(船橋里·선교리)'로 불렸고 선교장이라는 택호 역시 거기서 비롯됐다.
1965년 문화재(중요민속자료 제5호)로 지정된 선교장은 전통 한옥 중 최대 규모인 99칸 대저택일뿐 아니라 조선후기 상류층의 생활사를 알수 있는 고서적과 전통 의상, 각종 생활용품도 많이 보유한 귀중한 문화유산.
또 아름드리 노송과 대나무가 수호신 처럼 장원(莊園)을 감싸고 있고 왼편엔 호수와 동해바다가펼쳐져 천혜의 자연겨관을 자랑하고 있다.
본채만 99칸, 작은 집까지 합하여 3백여 칸에 이르던 이 대저택은 6·25전쟁으로 상당 부분 소실됐다가 최근 서별당등 일부가 복원되면서 본채가 85칸이 됐다.
크게 안채와 열화당(悅話堂), 동별당(東別堂), 활래정(活來亭), 서별당(西別堂), 행랑 등으로 구성된선교장 건물들은 건축 시기가 서로 달라 통일감이나 균형미는 없어 보인다.
하지만 바깥 담장도 없고 하인들이 부담없이 사용할수 있도록 행랑 마당을 갖추는 등 자유로움과너그러움, 활달함이 곳곳에 담겨 있다.
동시에 남녀가 따로 쓰도록 두개의 대문을 만든점 등은 유교사회의 엄격한 규범을 보여준다.이 곳에 터를 정한 내력도 흥미 있다.
효령대군의 11세손인 이내번(李乃蕃)이 강릉에 터를 잡기위해 자리를 살펴보던 중 족제비 무리가나타나 길을 인도 하더니 이 곳에 이르러 모두 자취를 감춰 버렸다. 내번이 망연자실 서 있다가주위를 둘러보곤 한 눈에 명당임을 알고 정착하게 됐다고 한다.
지금도 선교장 주변에선 족제비를 흔히 볼수 있다.
이런 내력에 의해 1700년쯤 건립된 안채는 선교장 건물 중 가장 서민적 풍모가 강하다. 안방과건넌방에는 살림 도구를 넣는 半寢(반침)이 딸려 있고 두방 사이엔 대청마루가 있으며 안방 앞에서부터 건넌방 앞까지는 널찍한 툇마루가 있다.
효령대군의 20대손인 이가백(李康白·52·선교장 관장)씨 내외와 이씨의 모친인 성기희(成起姬·78)씨가 안채에 살고 있다.
순조 15년(1815년) 건립된 열화당은 바깥 주인 전용의 사랑채로 선교장을 대표하는 건물.도연명(陶淵明)의 시 '귀거래사(歸去來辭)'에 등장하는 열친척지정화(悅親戚之情話)에서 이름을 따왔다고 한다.
여섯 계단을 밟고 올라가야할 만큼 우뚝 솟아 있고 작은 대청은 누마루 형식을 취해 운치가 있다. ㄴ자형의 방은 작은 대청과 대청 사이에 있고 장지문으로 사이를 막으면 셋으로 나뉜다.굴뚝은 대청뒤로 약3m가량 물려 높이 쌓아 올렸으며 우리나라에서 보기 드문 T자형 대들보를썼다. 여름에 문짝을 전부 떼어 처마 끝에 걸어 놓으면 사방에서 시원한 바람이 통해서 멋과 실용성을 동시에 충족시켜 준다.
열화당에는 천장에서 밀실이 있었는데 지금은 폐쇄됐다. 바깥 주인들이 기생을 불러 손님을 접대한 은밀한 공간이었는데 6·25때는 수백 가마의 곡식을 보관하기도 했다고 한다.동별당은 안채와 연결된 주인 전용 별당으로 1920년에 지어진 ㄱ자형 건물. 동쪽에 2개, 서쪽에 1개의 온돌방이 있고 앞면엔 넓은 툇마루를, 뒷면과 동쪽은 좁은 툇마루를 돌렸다.선교장 정원에 판 인공 연못 위에 세워진 정자가 활래정이다.
열화당이 지어진 이듬해인 순조16년(1816년) 세워졌다. 주자(朱子)의 시 '관서유감(觀西有感)'중爲有源頭活水來(위유원두활수래)에서 정자의 이름을 따왔다고 한다.
이 건물은 연못 안에 돌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지은 누각 형식의 ㄱ자형 건물로 마루 부분이 연못 위에 있다. 열화당과 같이 벽은 문으로만 돼 있으며 방과 마루를 연결하는 복도 옆에 접객용다실이 있어 근세 한국 특유의 건축양식을 보여준다.
학자들은 활래정과 맞닿은 인공연못은 네모난 형태로 그 중앙엔 도가(道家)에서 '피안의 섬'으로여기는 '봉래산'을 뜻하는 작은 섬이 있고 선비를 상징하는 소나무가 심어져 천지인(天地人) 합일사상을 투영하고 있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선교장은 사대부의 가옥들이 대체로 1개의 별당을 둔 것과는 달리 안채와 열화당 사이에 또 하나의 별당인 서별당이 있다. 서재겸 서고로 쓰였는데 서고는 누마루 형태로 이루어져 문을 열면 통풍이 잘 되고 마루는 여름철, 방은 겨울철 독서실로 이용됐다.
선교장엔 선조들의 숨결을 간직한 고서적 3천여본과 2천여점의 생활도구, 의상 및 자수 3천여점,전적류 1천여점 등이 있다.
별관 전시실과 본채에 나뉘어 전시돼 있고 일부는 대학박물관 등에 대여한 상태다.매년 10만여명의 관광객이 찾는 이 곳에선 3대째 수저 만드는 일만 고집해온 청동원조 참방짜집,목공예품을 만드는 원각공예방 등 전통의 맥을 잇는 장인들과 그들의 작품을 만날 수 있다.또 과객들이 시장기를 달래고 목을 축일 수 있는 주막도 있다.
관동대 건축공학과 정재국(鄭在國)교수는 『일제때 인재양성을 위해 곳간을 개조해 만든 동진학교, 뒷동산에 있던 팔각정, 별채등이 아직 복원되지 않았다』며 『특히 여운형(呂運亨)등 유수한인물들이 교수로 초빙돼 후학을 양성한 동진학교는 한국 사학의 효시로 연구 가치가 크다』고 평가했다.
〈高達順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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