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발굴...여성운동 대구.경북 1백년(50) 발전과 연대의 90년대

1990년대는 여성발전을 위한 법적.제도적 정비와 여성내부의식.역량의 발전이 결합되면서 주변적존재로 치부되던 대구.경북지역 여성들이 정치.경제적 주류화를 향해 매진해온 시기이다.보수적 가부장문화가 지배적인 이곳에서 "여성인 나, 여성인 우리는 가정과 사회.직장에서 이런어려움이 있고, 이런 불평등이 있다"고 터놓거나 고발하면서 적극적인 해결책을 모색해나간 발전과 변화, 연대의 시기였다.

90년대 대구.경북지역 여성운동은 첫째, 1991년 30년만에 지방자치제를 통한 지역여성들의 의회진출을 둘러싸고 한단계 비약적인 발전을 보이고 있다.

여성의 문제를 보다 효과적으로 해결하기위해 여성들의 의회진출을 늘려야한다는데 뜻을 같이한여성계는 여성지도자 발굴에 주력했고 여성정치지도자교육.의정학습방(대구여성유권자연맹), 지방자치와 여성의 정치참여(경북여협) 지방자치제에 대한 월례강좌.대구시민정치의식실태조사.민선대구시장 취임1주년 정책평가회(대구여성회)등을 통해 여성의 정치세력화가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91년 6월 부활후 첫 지방선거에서는 대구 이부연씨만 기초의회에 입성했으나 98년 6.4 지방선거에는 대구시의회에 김화자.백명희씨, 기초의회에 송외선. 임은경. 김영하. 강상연씨가 직접선거에의해 당선, 맹활약을 하고 있다.

교육위원은 윤위분(제1대) 손명숙.김애자(제2대) 김애자(제3대)씨가 당선됐다. 28일 창립할 한국여성정치연맹대구.경북연맹은 차세대 여성 정치지도자 발굴과 함께 사이버정치, 정치스쿨등을 열 예정이다.

둘째, 정신대할머니들에 대한 공식사과와 배상을 요구하면서 일제만행으로 피해를 입은 여권문제가 여성운동의 한축으로 들어왔다. 대구여성회(당시 이정선회장)는 92년 초입, 정신대 실태를 공개하면서 본인.유족에게 실질적인 배상과 공식사죄를 요구했고, 대구지역에서는 고 문옥주할머니가 처음으로 정신대였음을 고백하여 짓밟힌 청춘과 피눈물로 적셔낸 한평생을 공개했다.대구여협(당시 김영숙회장)은 92년1월 고려예식장에서 정신대 만행 배상 실천촉구결의대회를 갖고 반월당까지 시가행진을 벌였고 경북여협(당시 김도연회장)은 정신대만행 배상 실천촉구 규탄대회를 가졌다.

셋째, 여성관련 법.제도는 수준급이나 인식수준은 한참 뒤떨어져있는 현실에서 진보 여성단체들이법정비 이전에 여성과제를 푸는데 주도적 역할을 해나갔다. 88년1월에 창립된 대구여성회는 곧바로 성추행범의 혀를 잘랐던 안동 변월수씨 사건 대책위원회(9월)를 구성한데 이어 대구 북구 대현1동 파출소내 경찰관에 의한 여성윤간 사건(일명 강정순사건)이 터지자 3년여동안 이 문제를집중적으로 파고들면서 성폭행에 대한 인식을 넓혀나갔다.

함께하는 주부모임.전문직여성대구클럽.한국가정법률상담소대구지부.애린회.대구여성회 등 8개 단체가 시민협의회를 출범(92년2월)시켰으며 직장.근친.어린이 등 각종 성폭력추방을 위한 특별법청원서를 관련기관에 전달했다.

대구여협(당시 회장 김영숙)도 92년6월 성폭력추방이 건강한 사회를 만든다는 슬로건을 내걸고가두홍보전을 벌였는데 93년12월 국회에서 성폭력특별법이 국회를 전격 통과, '성적(性的) 자기결정권 침해'가 곧 성폭력이라는 인식을 심어나갔다.

대구여전은 성폭력상담소(소장 장기순)를 95년10월에 개설했고, 아내구타.아동학대가 더이상 집안일이 아닌 사회폭력의 한 형태라며 96년부터 가정폭력방지법 제정을 추진했다. 여전은 97년3월가정폭력치료센터를 전국 첫 개소하는 결실을 맺은뒤 시민단체와 가정폭력방지법제정(97년 11월)을 위한 연대작업에 들어갔다.

넷째, 95년 10월 여성의 사회참여를 위한 10대 과제가 선정되고 그해 12월 여성발전기본법이 제정되면서 경북도는 도본청 전입공무원의 10% 여성할당제를 도입했고 정부수립후 첫 여성구청장(남구청)에 이현희씨가 임명돼 여성계의 환호(자축연.94년4월)를 받았다.

대구시여성정책위원회(위원장 이영상) 경북도여성정책개발원(원장 김정옥) 구미시여성정책위원회가 96년, 97년, 98년에 차례로 개원됐고, 대구에서는 지방 최초로 행정2급(이현희대구시상수도본부장)이 탄생했다.

대구시의회가 여성발전과제에 공감, 발전기금 30억원 조성을 위한 조례안은 통과(97년)시켰으나여성정책보좌관(2급)을 신설하고 보좌관실 내 여성정책연구센터를 가동하여 체계적이고 장기적인정책과제를 거부, 여성발전의 걸림돌로 작용했다. 또 IMF이기는 하지만 9억원 책정됐던 여성발전기금 98년도 몫을 90% 가량 삭감, 겨우 1억원만 배정하여 "급하면 여성의 희생부터 담보한다"는의식의 후진성을 드러냈다.

다섯째, 환경오염에 대한 관심사를 높인것도 90년대 여성운동이 남긴 성과의 하나로 꼽힌다. 91년4월 전국을 뒤흔든 낙동강 페놀오염사건이 터지자 주부아카데미협의회는 대구시청앞에서 규탄대회를 열고 수도료 반환을 요구했으며 함께하는 주부모임도 수돗물오염 범시민대책위원회를 주도하면서 임산부 보상요구등 투쟁의 강도를 높여나갔다.

IMF가 터지면서 가장.남성.청년실직의 그늘에 가려있던 여성실업문제와 우선정리해고되는 성차별적인 구조조정에 적극 대응하면서 여성의 경제적 주류화 움직임이 뚜렷이 부각됐다. 대구여성회.대구여전.함주모.포항여성회등 진보여성단체가 실직여성의 생계지원과 고용창출을 위해 가장겨울나기.실직가정지원센터.위기가정지원센터등을 98년 9월부터 잇따라 개설됐다.

개화이후 100년의 역사를 가진 대구.경북 여성계는 여성정책의 주류와, 정부와 지방자치단체 산하위원회에 여성 30% 할당, 여성의 빈곤화를 막기위한 사회안전망구축을 포함한 21세기형 여성운동의 방향성 정립을 서두를 때다.

〈崔美和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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