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인도는 두 위대한 인물을 낳았다.
'간디'와 '타고르'. 오랫동안 영국의 식민지로 고통받아온 인도인들에게 모든 것을 초월한 인간성과 인도적인 정신의 깊이를 몸소 보여준 인물들이다.
이들은 서구의 물질문명에 동양의 사유와 직관의 정신세계라는 성수로 세례를 주었다. "이 세상은 하나의 둥지속에서 서로 만난다"라는 이들의 폭넓은 세계관은 세계시민의 정신과 인간, 자연의 조화의 예지를 강조한 화두였다.
1913년 동양인으로는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인도의 시성 라빈드라나드 타고르(1861~1941)가 20세기 인도인 나아가 서구인들에게 끼친 영향은 실로 크다. 시인이자 소설가, 철학자, 화가로 80년의 삶을 산 그는 우리시대의 위대한 유산이라고 할 수 있다.
캘커타에서 부유한 브라만가문에서 태어난 그는 집에서 힌두교육을 받았다. 17세때인 1878년 처음 영국으로 건너가 정식 학교교육을 받았지만 과정을 마치지 못하고 1880년 귀국했다.
이후 학교교육대신 다양한 문학적 활동을 펴기 시작한 그는 1890년 첫 시집 '마나시(이상)'를 펴냈다.
1880년대 인도에서 신구(新舊)의 대립은 유난했다. 전통적인 힌두교의 영광을 찬양하던 기성세대와 서양식교육, 근대과학의 지식을 가진 신세대의 대립이 그것이다. 당시 유명한 노작가 반킴찬드라 차테르지와 타고르의 품위있는 논쟁은 유명하다.
타고르는 새로운 문명의 흐름에 대해 옹호하는 편지를 차테르지에게 보냈다. "갠지스 강의 원천을 만드는 산들이 아무리 깨끗하고 아름답다 하여도 강은 흐름을 거슬러올라가 역류할 수는 없습니다. 강은 지저분한 평야를 지나 바다에 흘러들지 않으면 안됩니다. 거기에서 강의 운명은 성취되는 것입니다"라고.
당시 가문의 땅을 관리하는 일을 맡은 타고르는 문학과 함께 보편적인 인간성에 눈뜨게 되고 인도사회개혁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된다. 그의 이같은 사회적 관심은 1901년 산티 니케탄에서의 학교설립으로 이어졌고 우파니샤드적 이상에 대한 교육으로 발전했다. 이같은 그의 사회참여의식은 그를 인도 민족주의 운동으로 이끌어냈다. 거기에는 절친한 친구이기도한 간디가 있었다.
하지만 그의 나이 50세에 이르렀어도 타고르를 아는 인도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더욱이 서구사람들에게 타고르라는 이름은 생소했다. 고향 캘커타를 중심으로한 일부 지역에서만 명성이 있었을뿐 전 벵골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었다. 그의 문학적 재능은 극히 제한된 사람들 사이에서 겨우 인정받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는 시대적 편견이나 격정을 넘어서 시대에 앞장서 가고 있었다. 1913년 노벨문학상 수상은 그의 진면목을 전 세계에 알리는 전기가 됐다.
타고르는 50년동안 그가 겪은 인생의 갖가지 비탄과 고뇌, 사별과 좌절, 투쟁과 실의를 내면에서 용해시켜 노래로 만들어냈다. 1910년 '기탄잘리'라는 제목으로 출판한 157편의 시들이다.
원숙하고 순화된 마음에서 솟구쳐나온 이 노래들은 그에게 노벨문학상의 영예를 안겨주었다. 타고르가 직접 영어로 번역한 이 원고들을 처음 접한 시인 W·B. 예이츠는 전율을 느꼈다.
그의 노래는 위대한 아름다움이었다. 누구도 이같은 시를 읽어보지 못했다. 인도문화의 감성적 아름다움과 신비가 처음 서구에 처음으로 알려진 것이다.
1912년 영국 런던에 있는 '인도소사이어티'에 의해 한정판으로 출판된 이 시집의 영역본에 예이츠가 서문을 쓰면서 순식간에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채 일년이 되지 않아 그는 동양인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게 됐고 하루 아침에 유명해진 것이다. 그는 각지에서 동서 문화간 조화와 이해를 인식시키는 강의를 시작했고 1915년 영국 조지 5세로부터 기사작위도 받게됐다. 하지만 타고르는 1919년 영국 군대에 의해 400여명의 인도인이 죽음을 당한 암리트사르 대학살에 항의, 기사작위를 스스로 거부하기도 했다.
벵골어를 해독하는 사람들은 타고르의 시가 소박하고 순수하며 숭고한 사상이 담겨 있다고 평가한다.
특히 시집 '기탄잘리'에 담긴 시들은 신과 인간에의 사랑, 슬픔의 밑바닥으로부터 솟아나오는 힘과 기쁨, 오랜 사상의 역사에 감추어진 순수한 놀라움 등의 감정을 보편화시키고 불멸의 매력을 부여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죽기직전까지도 구술로 시를 쓸 정도로 시에 열정을 보였던 타고르. 그는 본질적으로 순수한 신앙인이었다. 고뇌의 불로 단련된 그의 내면과 정신세계는 삶이 죽음보다도 무겁고 인간의 정신은 삶보다도 광활하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그는 자연과 물질의 세계는 하나로 연결돼 있으며 우주의 법칙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는 것을 믿었다. 1941년 여름 조국 인도의 해방을 보지 못하고 조랑상코의 옛 집에서 숨을 거둔 타고르는 간디와 함께 인도현대사에 불멸의 유산을 남기고 떠났다.
〈徐琮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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