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파노라마 20세기문화(36)-윤이상

"'디멘션'이란 곡을 처음 들었을 때였어요. 일종의 파동음악을 시도한 작품이었죠.

그 에너지를 느끼면서 온몸이 마치 소리굽쇠처럼 진동하며 반응하기 시작했어요.

한동안 정신나간 사람처럼 주체할 수 없이 온방안을 헤매다녔던 기억이 납니다" 국내에서 '윤이상'이란 이름이 금기시됐던 80년대, 뉴욕에서 유학하던 중 그의 음악에 푹 빠져버렸다는 한 무용가의 말이다.

난해하기로 소문 난 윤이상의 음악을 찾아 급기야 지난 89년 젊은 무용가를 무작정 서베를린(당시 윤이상이 체류하던 곳)으로 달려가게한 것은 '무용'과 '음악'이라는 장르를 넘어선 예술적 '공명'이었으리라. 사실 '윤이상 음악'은 편안하게 '감상'할 만한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 심연에 깔린 정서와 철학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의 작품은 '현대음악'을 빙자한 한낱 허접쓰레기로 치부될 수도 있다.

윤이상의 작품은 '음악은 편안하고 아름다운 것'이라고만 생각하는 중생들의 무지몽매한 어깨를 내리치는 '죽비'와도 같다. 그를 이해하려면 우리도 고행과 참선을 거쳐 '공명'하는 방법을 터득하는 것이 빠를 것이다. 20세기 음악사를 장식한 한국의 현대음악가, '윤이상'은 도대체 누구인가?

▲조국이 버린, 그러나 조국을 사랑한 천재음악가

"나의 음악은 정의를 향한 절규에, 아름다움에의 호소에 더 가깝습니다. 거기에는 억압된 자들을 위한 위로와 외침이 있습니다" 지난 94년 출판된 '나의 길, 나의 이상, 나의 음악'에서 윤이상은 자신의 음악을 이렇게 표현했다.

'동백림 간첩단 사건'(박스기사 참조)으로 일컬어지는 시대상황은 그를 희생양으로 삼았지만 조국에 대한 그의 '절규'와 '호소'는 말년까지 계속 이어졌다.

'윤이상'이란 이름이 한국에서 받고 있는 천대에 비해 세계음악사에 끼친 영향력은 상상할 수 있는 것 이상이다.

그를 감옥에서 꺼낸 것도 조국의 양심적 지식인들이 아니라 독일정부의 강경한 요청과 세계적 예술가들의 줄기찬 노력이었다. 윤이상이 처음 유럽을 밟은 50년대 서양음악계는 기존의 음률주의를 탈피할 돌파구를 찾고 있었다.

윤이상은 1959년 다름슈타트에서 쇤베르크식 12음 기법과 한국적인 세계관을 음악 속에 접목한 '일곱악기를 위한 음악'을 발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예컨대 서양음악이 '도'와 '미'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는지에만 매달렸다면 윤이상은 음 하나하나가 독립적인 생명력을 발휘하는 동양음악의 기법과 정신을 도입, 세계를 놀라게 한 것이다.

슈니트케나 데비소프와 같은 현대음악가가 동양적 멜로디를 직접 차용한 것과 달리 윤이상은 동양의 본질적인 사상으로 음과 악기를 다루고 있다. 그의 음악은 어찌보면 음양오행이나 팔괘론, 한국적인 '한'을 표현한 것에 다름아니다.

독일국적을 취득하고 26년간 유럽에 머문 윤이상의 음악적 자취는 '동서양 음악의 조화로운 만남' 또는 '도교적 명상세계의 음악화'라는 말로 평가받는다. 그는 동·서양 뿐만 아니라 남북한의 화해를 위해서도 머리와 발을 쉬지 않았다. 이국만리에서 더 사무쳤던 고국에 대한 사랑은 '광주여 영원하라'(1981)같은 그의 작품속에 묻어난다.

지난 94년 9월 '윤이상 음악축제'가 서울, 광주, 부산에서 열렸다. 강제추방 25년만에 그의 음악이 고국에서 복권되는 해였고 귀국 전망도 어느때보다 밝았다. 그러나 그를 정치범으로 매도했던 조국은 그에게 마지막 치명타를 날렸다.

귀국 예정일 하루 전, 문민정부가 윤이상에게 '정치활동을 하지 않겠다는 서약과 과거에 대한 반성'을 요구한 것이다.

추앙받던 현대음악계의 거목은 26년간 이국을 떠돌다 '이제 내 고향은 남한도 북한도 아닌 독일'이라는 한스런 말을 남기고 95년 11월4일 베를린에서 사망했다. 등떠밀려 조국을 떠난 그는 끝내 조국에 돌아오지 못했다.

〈申靑植기자〉

---윤이상 연보

△1917년 9월17일 경남 통영에서 선비출신인 부친 윤기현과 농민출신인 모친 사이에서 장남으로 출생

△1935년 일본 오사카 음악학원에 입학. 작곡, 음악이론, 첼로를 배움.

△1944년 군복무중 반일활동으로 일경에 체포, 두달간 옥고를 치름.

△1950년 부산사범학교 음악교사로 일하던 중 국어교사 이수자와 결혼. 한국전쟁 발발 후 '전시 작곡가협회'를 조직, '한국작곡가협회 '회원으로도 활동.

△1953년 서울대학교 등에서 작곡을 가르치며 가곡, 실내악곡 등을 발표.

△1955년 '현악4중주 1번'과 '피아노 3중주'로 작곡가로서는 최초로 서울시문화상을 수상.

△1956년 '파리음악원'에서 토이 오벵에게 작곡을, 피에르 르벨에게 음악이론을 배움.

△1957년 독일 서베를린으로 옮김

△1959년 9월 네덜란드에서 '피아노를 위한 다섯개의 소품'이, 다름슈타트에서 '일곱 악기를 위한 음악'이 각각 초연, 현대음악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

△1967년 6월 17일 한국중앙정보부원들에 의해 베를린에서 서울로 납치. 이른바 '동백림 공작단사건'에 연루돼 제1심에서 종신형. 7년형을 받은 부인 이수자씨는 집행유예로 석방.

△1969년 2월 석방.

△1971년 독일국적 취득.

△1977년 베를린 예술대학 정교수로 부임. 87년까지 재직.

△1984년 베를린필하모니교향악단 창단 100주년 기념으로 윤이상 '교향곡 1번'이 초연됨.

△1987년 바이체커 대통령으로부터 '독일연방공화국 대공로훈장'을 받음.

△1992년 11월 일본 동경에서 '윤이상 75회 생일 기념 페스티발'이 개최됨. 그해 함부르크 아카데미가 주는 '플라케테'상을 수상.

△1995년 11월4일 베를린에서 사망.

---동베를린과 윤이상

1967년 7월. 한국의 국내상황은 날로 거세지는 부정선거 규탄시위로 어지러웠다. 이때 느닷없이 '동백림(동베를린)을 거점으로 암약해온 지식인 중심의 대규모 간첩단사건'이 중앙정보부에 의해 터져나오고, '반정부' 정국은 순식간에 '반공'으로 반전되기에 이른다.

일곱차례의 수사발표가 이어지는 동안 서울대 조교수 황성모씨를 비롯, 작곡가 윤이상, 이응로 화백 등 107명이 구속돼, 사형 또는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대학교수와 의사, 예술인 및 공무원 등이 1958년 9월부터 1967년 5월 사이 동독주재 북괴대사관과 접선, 그중 7명은 소련, 중공을 경유해 직접 평양을 방문, 교육을 받고 귀국해 간첩활동을 했다"는 이 무시무시한 사건의 관계자들은 3년6개월만에 모두 소리소문없이 석방됐다.

윤이상의 이름을 세계속에 알린 오페라 '나비의 꿈'도 당시 감옥에서 언손을 녹여가며 써내려간 작품이다.

당시 중앙정보부장이었던 김형욱은 이후 자신의 회고록에서 "나는 관련자 모두에게 인간적으로 용서를 빌고 싶은 심정이었다. 동백림사건은 나에게 많은 교훈을 남겨주었다"는 솔직한 고백을 남겼다. 그러나 분단된 역사가 만들어낸 희대의 간첩단사건은 이미 윤이상을 비롯한 지식인들에게 치유될 수 없는 상처를 남긴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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