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혹 절에서는 평소 모시기 어려운 큰 스님을 모실 때가 있다. 그러면 계절에 맞는 햇과일이나 채소로 정갈한 상을 마련한다. 그런데 이런 새롭고 싱싱한 반찬보다 더욱 정성스럽게 마련되는 음식이 있다. 바로 지난해 담아 두었던 송이찌나 대중스님들의 운력으로 장만한 찹쌀가루 묻힌 감자, 김, 오동잎 부각, 담궈 두었던 콩잎·깻잎, 먼 곳에서 도반의 건강을 염려해서 보내준 갓으로 담근 갓김치며 물김치, 뒷손을 부치지 않은 된장, 한해 넘긴 매실차와 햇솔로 담아 놓은 송차로 조심스럽게 공양상을 마련한다.
가만히 들여다 보면 어느 하나라도 숙성하지 않은 것이 없으며, 다듬고 손질해서 일정한 시간을 보내도록 배려하는 정성이 여간한 것이 아니다. 각각이 가진 모든 맛과 빛이 자유롭게 분출되고 어우러지도록 기다려 완성한 하나 하나의 결실이라고 할만하다. 그 계절에 풍성하게 주어지는 재료로 다른 계절에도 그리고 다른 이들도 먹을 수 있도록 준비하는 시작, 제대로 익히기 위해 묻히고 말리고 간수하는 과정, 필요한 이와 반가운 이에게 내어놓는 마지막, 이 모두가 아름다운 한 삶을 보는 듯 하다.
지금 내 손이 닿고 있는 것 중에 10년, 혹은 그 이상의 세월이 지난 뒤에 더욱 성숙한 모습으로 남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을까. 지금 주어진 모든 것을 가지고 향기도 좋고 맛도 좋은 인생을 제대로 연출하고 있을 것일까.
인생은 드러나는 성과만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시작하는 마음이나 살아가는 생활이나 지금의 모든 것에 이르기까지 어느 한가지라도 중요하지 않은 것은 없다. 수천겁을 살아온 인연의 삶은 습관으로 이어져 있어 지금의 정성과 노력은 다가올 수억겁을 바꾸는 새로운 시작이다. 지금은 바로 처음이자 중간이며 끝이므로.
알고 나면 더 물들지 않는게 성품(性品)이요, 결과에 따라 선악(善惡)을 결정하는 것은 습관이니,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끝도 좋으며 맛도 좋고 향도 좋을 수 있도록 성실함으로 채워가자. 어느날 문득 마중나온 이에게 단지 일 없음을 말할 수 있도록.
보현사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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