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에서 일본 규슈(九州)지방으로 여행할 경우 부산항에서 후쿠오카(福岡)까지 3시간만에 도착하는 쾌속선을 이용하면 이색적이고 편리하다. 부산항 국제선 부두에서 '비틀 2호'를 탔다.
기타규슈(北九州)시에서 '다나카(田中)스틸 주식회사'를 경영하며 포항제철 설립 초창기에 자문 역할을 많이 했던 대구 출신의 서흥찬(徐興讚·70) 회장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규슈지방 제2의 도시인 기타규슈시에는 얼마전부터 한국민속문화를 가르치는'혼화회(魂化會)'라는 문화강좌가 열리고 있다. 서홍찬씨는 강좌가 열리는 한국회관 건립을 위해서도 사비를 기부했고 처음부터 비용을 부담하며 모임을 운영해 온 기업가 이다. 이 강좌에는 초빙된 전문교수들이 한국문화와 일본문화의 차이, 한국의 정신세계, 한일 고대문화의 원류 등에 대해 지역 주민인 일본인들과 재일동포들에게 가르치고 있다.
한·일간의 상호 이해를 위해서는 서로 문화적 차이점을 잘 알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서씨는 "일본의 경우 손님이 오면 현관에 꿇어앉아 절하고 방으로 모신 뒤에도 방석을 내고 다시 무릎꿇고 절하는데 한국은 이런 풍습이 일상화되지 않았다고 해서 예의가 없는 것으로 안된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는 남여유별이며 반가우면 버선발로 뛰어나와 반갑게 손님을 맞아들입니다. 이러한 양국 문화의 차이를 인정해야 합니다. 상대와 문화가 다르다고 무시하면 안되지요"
서씨의 학력은 일제시대 소학교 졸업이 전부이다. 2차대전이 끝나갈 무렵 그는 상급학교로 진학할 나이였는데 부친은 이를 포기시켰다. 학교에 가면 학병으로 일본 군대에 끌려가야 되고, 그러면 남의 전쟁에서 죽게 된다며 일본 중학교의 공부를 중지시키고 대신 집에서 한국 역사와 문화를 가르쳤다. 민족운동을 하는 부친의 친구들이 만주에서 찾아오기도 했고 그들로부터 자연스럽게 민족의식을 배웠다서회장의 집안은 대구 토박이로 성당동에서 대대로 살아왔다. 그의 부친은 1920년대 초반, 학업을 위해 일본으로 갔고 기타규슈시에서 결혼해 정착했기 때문에 서씨는 재일동포 2세로 태어나게 된 것이다.
해방이 되자 서씨와 가족들은 고국으로 돌아와 할아버지가 살고 있던 대구에서 살았다. 그러나 부친은 일본에 남아 있던 재산을 처분하기 위해 다시 일본으로 돌아갔다. 당시 17세였던 서씨는 가족들의 생계를 위해 한 일간신문사의 보급소에 취직해 수금 업무를 맡는 등 잡무를 보며 생활전선에 뛰어들었다.
해방 직후 2년 동안의 대구 생활 때는 가족 모두가 어려웠다. 그 때문에 다시 부친이 있는 일본으로 돌아가 가족이 함께 모였다. 일본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돼지를 키우거나 밀주를 만드는 정도의 일 밖에 없었다.
6·25전쟁이 일어나자 일본에서는 군수산업이 활발해져 많은 재일동포들이 고철장사를 시작했다. 부친으로부터 이 사업을 물려받은 그는 쇠에 대한 공부를 시작했다. 쇠를 녹이는 로(爐)에 대한 공부와 제철 뒤에 나오는 폐기물을 이용하는 방법을 연구하는 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
"당시에는 고철을 모아다가 큰 제철회사에 단순히 납품하는 형식이었는데 나는 제철소에서 이용하기 쉽도록 부가가치를 높여 납품을 했지요"
당시 일본 최대의 철강회사인 야하다제철(지금의 신일본 제철)은 그의 다나카스틸에서 들어오는 납품 물량이 많아지자 관심을 갖고 신뢰하기 시작했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건설공사가 시작되자 철강의 수요가 높아져 한국 수출도 시작됐다. 그의 사업은 성장하기 시작했고 회사도 커졌다. 그 무렵 한국에서는 제철산업이야말로 국가발전을 이끄는 핵으로 보고 포항제철의 설립을 준비하고 있었다.그는 한국에서 제철을 배우러 오는 기술자, 시찰오는 정부 관계자, 국회의원 등의 안내와 상담을 맡았다. 전 포철회장이었던 박태준씨도 여러번 찾아왔다. 한국에서 포항제철이 가동되는 것을 보고 그는 감동했다. "일본에서는 그 당시 우리나라의 힘이나 기술력으로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본격적으로 철을 만드는 것은 꿈에도 생각 못했었지요. 그것을 박태준씨가 이루어 냈습니다. 그것은 나의 꿈이기도 했지요"
한번은 포철을 방문했을 때 있는 제철 뒤에 나오는 슬러지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것을 봤다. 관계자는 처리할 기술이 없어 방치했으며, 제철회사마다 골치덩어리라고 했다.
"그때 이를 2차 3차 재활용할 수 있는 마지막 공정의 기본적인 노하우를 주선했지요. 포철도 이를 시행할 여력이 있었고요"
포철측에는 그 사업을 맡아 줄 것을 부탁해왔다. 그는 자본을 투입하고 인천선강주식회사를 설립, 슬러지 재활용 공장을 가동했다. 환경오염 등으로 문제점을 야기시켰던 슬러지 처리의 새로운 장을 연 것이다. 그는 사업 모체인 다나카스틸 외에도 포철의 계열사인 포스콘과 합작해 포스콘 재팬을 설립하고 한국제품을 일본으로 수출하고 있다. 또한 그는 달성 서씨의 달성이란 이름을 따서 무역회사인 달성산업주식회사를 서울에 설립하기도 했었다.
이처럼 각종 사업을 확장해나가자 자연스럽게 한국의 정치가들과의 인연도 깊어졌다.
"사람의 인연이란 참으로 알 수 없는 것 이었어요. 특히 나와 관련된 박태준씨와 YS의 인연을 보면 말이예요. 최고위원 자리를 물러나 일본에 머물던 박태준씨도 우리 일을 조금 봐 주기도 했지요. 그런데 이번엔 일이 반대로 돼서 지난 6월 YS 일행이 첫 외유지역으로 이곳 큐슈지역으로 왔지요. 한국 공항에서 봉변을 당하기도 했지만 인연은 어쩔 수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1978년 그는 방위성금으로 그 당시 개인으로는 최고금액인 1억원을 냈는데 언론에 보도되자 일본 세무서로부터 세무사찰을 당하기도 했다.
대전서 전국체전이 열렸던 1979년 재일동포 선수단 단장으로 고국을 방문하면서 체육회 활동을 시작해 지금은 재일 대한체육회 중앙본부 상임고문직을 맡고 있으며 민단 중앙본부 고문직도 맡고 있다.
얼마전 서씨는 KBS선정 해외동포상 중에서 특별공로상을 수상했다. 이 상은 해외동포를 대상으로 세계와 조국을 위해 기여한 사람에게 주어진다.
서씨는 고철상에서 시작해 다나카스틸을 창업했으며 우리의 제철산업이 일본 철강산업계에 진출하는데 도움을 줌으로써 재일동포들에게 민족적 자부심을 심었고 모국 경제발전에도 크게 기여했다는 것이다. 그날 식장에는 이만섭 국민회의 총재대행, 이어령 교수, 김홍식 금복주 회장 등 많은 사람들이 참석해 그의 수상을 축하했다.
朴淳國 사진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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