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로부터 영남은 자긍과 지조의 고장이었다. 경북 봉화, 영양의 산골에서 부터 경남 함양, 하동의 지리산 자락까지 그 정신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대구·경북, 그리고 일부 경남지역의 땅을 쫓아 영남기행에 나선지 11개월째. 신발끈을 졸라매고 길을 처음 나설 때의 다짐과 설렘이 시리즈를 마감하는 지금에도 여전히 남아있다.
눈,비를 맞는 날도 있었고 무더위에 신음도 했다. 찬란한 일출과 가슴 아슴한 일몰도 봤다.
새로운 천년, 21세기를 앞두고 그렇게 둘러본 우리네 땅은 아쉬움과 새로운 비전의 파노라마였다. 지운(地運)과 인력(人力)에 따른 쇠퇴와 도약이 교차하고 있었다. 하지만 모두가 발전을 지향한 삽질에 매진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음은 분명했다.
못다 찾아본 지역들은 다음 기회로 미루고 1년동안 취재하면서 기억에 새겨두고 싶은 취재 현장들을 독자들과 함께 되새겨보며 시리즈를 마감한다.
○…낙동강 옛나루터의 흔적을 취재하러 나섰던 지난 4월의 어느날. 예천군 풍양면의 한 산골마을에서 취재진은 마을노인들과 소주잔을 기울이며 둘러 앉았다. 마을노인의 첫 얘기. "나는 쭛쭛정(鄭)가인데 자넨 본관이 어떻게 되나" 경상도 노인들과의 대화는 대개 이렇게 시작된다. 그 다음 주제는 조상, 마을, 농사, 자식들 얘기… 거의 일정한 패턴으로 진행되기 마련이다. 그속에는 어떠 어떠한 가문에 소속돼 있고 어떠한 마을에 살고 있다는 자긍심과 애착이 배어 있다. "조상 잘 모르는 후손이 잘 되는 것을 못봤어"라는 얘기까지 항상 덧붙여진다.
○…쓰러져 가는 농촌. 현대화의 물결이 거세질수록 '농촌'은 버림 받은 땅이 되어 왔다. 뼈가 으스러지도록 지은 농사는 돈이 안되고 사람은 떠나고…
과연 희망은 없을까. 10개월 동안 신영남기행을 취재하면서 취재진은 그 '희망'을 찾으려 무던히 노력했다.
영주시 안정면에서 만난 사과밭. 한때 지역을 대표하던 사과가 천덕꾸러기 신세로 전락한 요즘. 하지만 그곳에서 만난 사과 묘목에서는 '미래'가 싹트고 있었다.바로 신경북형 사과. 비탈밭 1만여평을 시원스레 밀어낸 뒤 반듯하게 정돈된 과수원. 외국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횡과 열을 맞춰 자라고 있는 사과 묘목.
이 과수원은 '인력은 70%가 줄고 수확량은 2 ~3배 늘어난다'는 신경북형 사과의 시험 무대였다. 취재중 흔하게 볼 수 있었던 사과 나무를 베어내는 모습들. 그 '절망'과 대비되었기에 신경북형 사과밭은 더욱 밝아 보였다.
○…하지만 우리의 농·어촌은 아직 '미래'를 말하기엔 일러 보이기도 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학교.
지난 1월 성주군 가천면 금수 분교를 찾았을 때였다. 나지막한 산을 뒤로 끼고 양지바른 곳에 자리 잡은 학교. 마치 평화를 연상시키는 이 학교는 취재진이 찾았을 때 폐교 준비로 마지막 분주함을 떨고 있었다. 한때 전교생이 500명이 넘었던 학교. 처음 가본 곳이었지만 전혀 낯설지 않는 학교의 운동장과 교실들. 며칠뒤면 아이들의 온기가 사라지고 싸늘한 콘크리트 더미로만 흔적을 알수 있을 터였지만 운동장 한편에서는 아직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있었다. 물론 취재진의 가슴 한편도 웬지모를 '허전함'이 깊게 울렸다. 마을 공동체의 중심이 되었던 학교. 그러나 어디를 가든지 늘어 가는 폐교의 현실은 '미래'의 어두운 그림자처럼 보였다.
○…오지 노선의 마을 버스 취재를 위해 도착한 영양·영덕지역에서는 시골버스를 통해 소외받는 농촌 현실이 고스란히 투영되고 있었다. 영양 상원2리, 도시를 향해 떠나 버린 젊은이들로 나이 지긋한 노인네들만으로 대다수 채워진데다 경제적 여유나 현실적 여건(면허취득)도 되지 않아 아이 등하교와 주부 장보기, 노인들의 내왕 등 주민 삶이 버스 시각에 온통 얽매여 있었다. 그럼에도 버스는 적자가 난다며 자꾸만 줄어들고…. 영덕 창수면 신리2리와 갈천1리 등지에는 아예 버스가 다니지 않아 아직도 간선도로에서 마을까지 10리 길을 걸어다니고 있었다.
○…해안 관광지 조성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울진·영덕 기행에선 울진과 영덕이 그려내는 모습들이 닮은 꼴이란 점에서 차별화가 아쉬운 대목이었다. 대게를 서로가 관광상품으로 자랑하고 있었고 긴 해안선,해돋이 등을 내세우기도 마찬가지였다. 두 지역이 경계를 허물어 공동으로 관광상품을 개발하거나 상대방이 유리한 분야쪽은 서로가 인정하고 아예 양보함으로써 각자가 특색을 갖는 쪽으로 지혜를 모으는 것이 좋을 듯 했다.
○…4월에 찾은 울릉도. 동해의 섬은 한참 시끄러웠다. 그 화두는 개발과 보존. 흔히 울릉도를 다녀온 이들은 한번은 가볼만 하지만 두번은 아니라고 한다. 나리 분지의 원시림과 태화령 고개의 절경. 그리고 더 없이 넓은 동해 바다. 처음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감탄을 자아 낼수 밖에 없다.하지만 3시간을 가야하는 뱃길과 부족한 편의 시설. 밤이 되면 섬 전체가 적막속에 빠져든다. 갈곳이 없기 때문이다.이 모든 것의 해결책은 공항. 그러나 공항 건설에 따른 섬의 훼손을 우려하는 일부의 주장과 재원 마련의 어려움이 '섬의 발전'을 막고 있었다. 2000년을 눈앞에 두고도 아직 '길'이 열리지 않고 있는 셈이다. 울릉도가 열린다면 우리의 땅 독도도 좀더 가까워지지 않을까.
○…주민 350명당 1명꼴로 성업중인 성주지역 소위 티켓다방 취재는 그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이미 농촌 삶의 한 전형으로 자리잡고 있음을 불가피하게 시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비닐하우스에서, 식당에서, 노래방에서···, 사실 가정집을 제외하고는 다방 여종원들의 모습을 지천으로 볼 수 있었다. 소외된 이들의'회포 시공(時空)간'인 셈이었다. 물론 건전한 영업행태를 유도하기 위한 감시는 필요하다○…대구·포항과 같이 지난 49년 시 승격이 되고도 지금은 천양지차의 초라한 모습으로 남은 김천 기행에서는 하나의 큰 산업 유치가 도시발달에 얼마만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를 절감케 했다. 포항은 포항제철로, 그리고 김천보다 한참 뒤떨어져 시로 승격된 구미는 구미공단으로 김천을 한참 앞서 달리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바다를 끼고 있는 포철과는 달리 경부고속도로라는 같은 선상에서 볼때 구미의 공단유치는 사실상 선택의 문제였다. 대통령을 낳은 도시의 혜택을 구미는 본 것이고 그런 점에서 권력 창출의 위세를 느끼게도 해 주고 있었다.
○…영남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대구. 250만 인구의 85%이상이 대구·경북에 뿌리를 두고 있는 보수적인 도시다. 대도시다운 역동성이 보이지 않고 마치 물이 고여있는 것 처럼 다소 답답해 보이고 정체되어 있는 듯 하다.
예전과 달리 정치, 경제, 사회 등 모든 분야에서 발전 가능성이 크게 없어 보이는 듯 하지만 아직까지 희망은 있다. 한 공무원의 얘기다. "대구는 여러 여건에 비추어 외형적인 성장 가능성은 많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인구 구성면에서 동질성, 도덕성, 전통미 등을 갖추고 있어 내실을 기할 여지가 많습니다" 경상도 사람의 기질을 살리면 어느 곳보다 평화롭고 인정많은 고장이 될 수 있다는 것. 영남사람들이 앞장서 우리 것을 살리고 새로운 기풍을 가꾸는 21세기를 자못 기대해본다.
댓글 많은 뉴스
尹, '부정선거 의혹' 제기 모스 탄 만남 불발… 특검 "접견금지"
李 대통령 "돈은 마귀, 절대 넘어가지마…난 치열히 관리" 예비공무원들에 조언
윤희숙 혁신위원장 "나경원·윤상현·장동혁·송언석 거취 밝혀야"
정동영 "북한은 우리의 '주적' 아닌 '위협'"
尹 강제구인 불발…특검 "수용실 나가기 거부, 내일 오후 재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