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주말에세이-잊지 말자, 그러나 이제 화해하자

굶주림 없는 풍요 속에 성장해온 오늘의 젊은 세대에게 50년 전 6·25전쟁은 이미 역사 속의 망각된 사건에 다름 아니다. 피자나 햄버거를 먹으며 화상공간속에 몰입되어 인터넷을 통한 정보교환, 피시방·게임방의 가상현실에 익숙한 그들에게 이념·민족·분단을 앞세워 "육이오 때 피난 나서서 먹을 건 없고 철부지 애들은 배고프다고 짜는데…"란 아버지세대의 회고담은 이미 과거완료형의 푸념이지 현실감으로 닿아올 리 없다.

2000년 6월 13일부터 사흘 동안 평양에서 열린 남북정상회담은 그런 의미에서 분단현실의 질곡과 전쟁의 상처를 망각한 젊은 세대에게는 큰 충격과 교훈을 주었다. 김정일의 활달한 언행과 말쑥한 평양거리는 그곳도 사람이 사는 곳임을 인식시켰고 통일이 왜 이 민족 최대의 숙원임을 각인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아물지 않은 동족상잔의 비극

수입된 이념을 총구로 삼아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자유민주주의와 인민민주주의, 좌익과 우익이란 이름의 대립적 구도 아래 출발한 45년 해방은 우리 스스로가 쟁취한 참다운 민족해방이 아니었다. 50년의 6·25전쟁 전까지 해방공간 5년동안 남한은 대구항쟁, 제주도 4·3항쟁, 여순사건 등 준전시 상태를 방불케 하는 혼란 와중에 13만명 이상의 동족이 적이란 이름 아래 희생당했다. 50년 6월 25일부터 37개월 동안의 전쟁은 승자 없는 동족상잔으로, 남한은 150만명 이상, 북한은 300만명 이상이 살상당했다. 희생자는 전투원보다 민간인 수가 많았으니 인민군 점령하의 남한 곳곳에서 벌어진 우익인사의 처형과 의용군 강제징집은 무고한 생명을 앗아갔고, 남한측은 전쟁 이전 좌익성향자로 분류해 놓은 보도연맹 가입자의 집단 처형만도 20만명 이상으로 추측된다. 거창·산청양민학살사건을 비롯하여, 지난 4월에야 50년 만에 밝혀진 경북 칠곡군 신동면의 어린이를 포함한 좌익성향자 200여명 처형도 여기에 해당된다.

멀고도 험한 그러나 반드시 이뤄야할 통일

3년간 전쟁이 남긴 후유증은 여러 점으로 검토될 수 있는데 첫째, 남북 상호불신의 골이 더욱 깊어졌다는 점이다. 남·북한은 어느 가정이든 직간접으로 피해를 입지 않은 가족이 없으므로 증오에 따른 불신의 골이 깊어졌고 분단의 장벽은 더욱 견고해졌다. 둘째, 유교 전통의 공동체가족 해체가 가속화되었다. 전쟁 고아와 미망인의 대량 발생으로 가정의 파괴는 물론, 남북한 이산가족 수가 1천500만명을 넘었다. 생이별한 이산가족은 그 후 50년 동안 가족의 생사조차 알 수 없으니 세계사에도 이런 비극은 흔치 않다. 셋째, 전쟁 후 지속되어온 냉전체제는 쌍방 소모성 북방비의 과다지출로 경제적 손실이 막대했고, 막강한 군의 힘은 정치참여의 길을 터놓았다. 북한의 일인 장기집권과 세속체제, 남한의 31년에 걸친 군사정권은 이 땅에 진정한 참여민주주의의 길을 후퇴시켰다. 넷째, 분단의 장벽 아래 생활·문화·언어의 이질화로 남북은 단일민족의 정통성을 상실했다. 남한의 자본주의 시장경제, 북한의 국가통제경제는 서로간 삶의 방식을 달리하게 했고, 종교·교육·언어·관습 등 남북이 독자적 길을 걸음으로써 양극화의 현상은 뚜렷해졌다.

성실과 끈기로 조금씩 다가서야

6·25 전쟁 50주년을 앞두고 남·북한 정상의 '6·15 공동성명' 발표는 그런 측면에서 분단 반세기에 획기적 성과라 아니할 수 없다. 이 땅에 전쟁의 공포를 종식시키고, 남·북한이 자주적으로 통일의 실마리를 풀어나간다는 전제 아래, 이산가족의 편지왕래와 상봉, 경제협력을 통한 상호 협력증진의 합의 도출은 증오에서 화합으로, 불신에서 신뢰로 남과 북이 그 기반을 조성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그러나 지구 최후의 분단국에서 벗어나는데는 아직도 넘어야 할 험로가 한둘이 아니다. 흥분상태의 환상적 기대에서 한 발 물러나 차분하고 냉정하게 쉬운 고리부터 하나하나 풀어나가는 성실과 끈기가 요구된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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