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주말 창가에서-익명으로 살고 싶다

덥다. 옷을 훌훌 벗어던지고 신천 푸른 물에 첨벙 뛰어들고 싶다. 커피숍에서 만난 '그'는 한사코 이름 밝히기를 거부했다. "이 작은 성금이 실제로 그 소년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그때도 요즘처럼 무더운 날씨였을 것이다. 신문에 난 소년가장의 딱한 사정을 들은 '그'는 "성금을 전해달라"며 기자를 만나자고 했다. 그러면서 그 흔한 이름 석자를 끝내 거부했다. 돈이 적어서도 아니었다. "직원 여남은 둔 조그마한 가내공업을 하고 있다"는 '그'는 "내가 이렇게 기부한 것을 알면 직원들이 나를 어떻게 보겠느냐"며 되레 통사정했다. "직원들에게 삼겹살에 소주 한 잔 살 줄 모르는 위인이…"라며 비아냥할 것이고 주위의 친지들도 "차라리 우리에게 수박 한 통 사다줬더라면 고맙다는 소리라도 듣지"하는 소리가 뒤통수를 때린다는 거였다.

창궐하는 익명

본사를 서울로 옮겨야 할 것 같다고 푸념하던 중소기업체 사장을 만난 것도 그즈음이었다. 자기 정도의 기업이면 서울에서는 명함도 내밀 수 없는데 대구에 사업체를 두니 업무상 불편도 불편이지만 주위에서 내미는 손들 때문에 도무지 사업을 제대로 할 수가 없다는 하소연이었다. 서울이나 수도권에서 큰 기업들에 파묻혀 사업을 할 수 있다면 그만큼 더 수월하게 이익을 낼 수 있다는 얘기였다. 물론 대구 경북이 정치의 중심에 있었고 IMF가 뭔지도 모를 때였다.

앞의 예들이 익명으로 사생활을 보호받으려는 것이듯 우리 사회에서 실명만으로 살아가는 것이 쉽지만은 않다. 사회구성원으로서의 개인의 프라이버시가 보호받지 못함으로써개인의 다른 사회적 활동에서 불이익을 당할 수도 있다. 하긴 '삯바느질 할머니의 억대 장학금 쾌척'같은 낭보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사이버상에서 더욱 기승

익명이 언제나 좋은 의미로만 쓰이는 것은 아니다. 익명성은 개인의 사생활 보호라는 순기능보다 부도덕과 무책임 등 부정적 이미지가 더 큰 것도 사실이다. 우리 사회의 익명은 무언가 떳떳지 못하고 불법이나 반사회적 규범을 연상시키는 것을 부인하기 어렵다. 익명이 우리 사회의 무책임성을 부추기고 있다는 혐의도 지울 수 없다. 그래서 이런 익명에의 욕구가 늘어나고 있음은 우리 사회가 무언가 건강하지 못하고 한 쪽이 병들어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 같아 씁쓸하다. 어쨌든 다시 익명이 창궐하는 시대다.

건강하지 못한 사회반영

영업용 택시의 앞자리 잘 보이는 곳에 붙여놓게 되어있는 운전자격증이나 차량번호표지가 달력 등 무엇인가로 묘하게 가리어져 있을때 이 택시기사의 정체는 과연 무엇인지 내릴때까지 궁금해진다. 도심에서 번호판이 흙칠돼 가려진 덤프트럭이 차로를 마구 바꿔가며 승용차를 추월해 달리는 옆을 지나면 불안해진다. 회사로 전화를 건 뒤 자신의 신분은 접어두고 막무가내 욕설과 시비를 걸어오는 수화기 저쪽의 목소리도 불쾌하다.

디지털시대. 지금 사이버 세계에서는 얼굴없는 네티즌들의 예의없는 설전들로 온통 시끄럽다. 한때 유행했던 '묻지마 관광'을 연상케 하는 젊은 네티즌들의 '재핑 러브(zapping love)'가 물에 잉크 번지듯 확산일로에 있다. 익명이 가능한 인터넷을 한껏 활용한 이런 사회현상들은 전문가들이 그 병리현상을 규명하고 답을 내놓기 이전에 이미 버전을 바꾸어 버린다.

대구를 비롯한 지방이 서울에 비해 끝없는 하향화를 계속하고 있다는 서글픈 뉴스가 다시 무게를 싣고 있다. 세상이 바뀌면서 지방화다 정보화다 떠들어대기에 무엇인가 변화가 있을 것이라고 기대를 걸었던 데 대한 반발이다. 왜 지방은 이렇게 밀리고 처지기만 하나. 공직에 특정지역 인사 편중과 낙하산 인사가 연일 여론의 집중포화를 받고 있다. 정치세력의 중심이 바뀐 지금, 이름을 가리고 싶어하던 '그들'은 지금 어떤 심경일까?

중앙과 지방이 정보의 접근에서 차별없는 사이버 세상에서는 중앙과 지방의 차이가 줄어들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신천에라도 뛰어들고 싶을 만큼 짜증나는 무더위가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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