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미주 이민100년...(9)멕시코-노예의 삶

차라리 한바탕 꿈이고만 싶었다.

이상향을 그리며 천신만고 끝에 당도한 미지의 세계. 멕시코 유카탄에서 한인들이 접한 것은 떼돈을 버는 '지상낙원'이 아니라 비참하고 억울한 '노예의 삶'이었다.

희망이라곤 전혀 없는 냉혹한 현실 뿐이었다.

'영양실조로 탈진한 상태에서 들판의 천막에서 지내다 노예경매같은 절차를 거쳐 건강한 사람 순서로 수십명씩 애니깽 농장주들에게 끌려가 이산가족이 생겼다.

20여개 농장에 분산배치된 우리는 섭씨 40도를 넘는 지옥의 불가마 속에서 하루 12~15시간 가시밭에 들어가 애니깽 잎을 칼(마체테)로 잘라 다발로 묶어 가공공장으로 옮기는 고된 노동을 했다.

가족단위로 제공된 5평 정도의 초가 움막은 가축을 키우는 토굴과 다름없어 매우 불편했다'.

1905년 멕시코 이민선에서 태어나 1950년대 중반 재미 항일단체인 국민회 산하 묵경(墨京·멕시코시티)지방회의 마지막 회장을 지낸 최병덕이 남긴 일기 '교포역설'은 당시 한인들에게 닥쳤던 비극의 서막을 이렇게 표현했다.

현지 마야 원주민 말로 '에네껜(henequen)'이라고 하는 애니깽은 길이 1~2m, 너비 10~20㎝의 두꺼운 잎사귀가 50~100개씩 뭉쳐 자라는 선인장의 일종. 잎 밑부분을 베어내 으깰 때 나오는 흰 실타래같은 섬유질을 여러 가닥 묶어 꼬면 선박용 밧줄이 되고 노끈과 가방의 원료로도 쓰인다.

한인들은 잎 끝과 양 옆에 강철같은 가시가 무수히 돋친 이 식물을 '어저귀'나 '용설란'으로 불렀다.

영화 '애니깽'의 모델로 지난 89년 104세에 숨진 최후의 이민 1세대인 김순이(김흥순)씨의 장남 고흥룡(98)씨는 "단단한 애니깽 가시에 온몸이 수없이 긁히고 찔려 피가 철철 흘러도 치료를 받지 못한 채 아픔을 견디며 하루 5천~6천개의 잎을 따 25개씩 1다발로 묶어 옮겨도 이민모집 때 약속한 일당 1원30전~3원은커녕 35전밖에 못받았으며 이마저 식대와 주거비로 떼이면 10전만 손에 쥐었다"며 "할당량을 채우지 못해 매를 맞거나 온가족이 동원돼 중노동을 했다"고 증언했다.

농장일을 벼베기 정도로 쉽게 생각했던 한인들은 백인 농장주와 감독들로부터 일이 느리다거나 잘 못한다며 물에 적신 가죽채찍에 맞는 등 감당하기 힘든 생활로 신천지에 대한 꿈은 깨지고 말았다.

오직 하루하루의 생존만이 절실한 과제가 됐다.

고씨는 "짐승처럼 혹사당하는 처참한 대우에다 심각한 언어장애와 문화적 이질감이 더해져 고통은 가중됐다.

농장에서 태어난 한인 자식들은 농장재산으로 취급되고, 일부 노약자와 부녀자들은 다른 곳에 팔려가 가족과 생이별한 경우도 있었다"고 말했다.

유카탄의 한인 2세들은 한결같이 "매맞아 죽은 경우도 많았고 향수병과 화병으로 자살하거나 병들어 허허벌판에 버려지기도 했다.

부인들은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운 생활고를 못견뎌 목숨을 끊기도 했다"며 농장생활의 참상에 치를 떨었다.

노예의 굴레를 벗어나려는 숱한 탈주시도가 있었으나 거의 대부분 추적대에 붙잡혀 감금된 뒤 발가벗거져 채찍을 맞거나 손발이 잘리는 등 무섭고 잔인한 체벌을 받았다고 한다.

첸체농장의 한인 130여명은 가혹행위를 피해 달아나다 발각된 한인 청년을 구출하려고 폭동과 집단파업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민브로커의 사탕발림에 속아 돈에 팔려와 착취당하고 있음을 뒤늦게 깨닫고 후회했으나 하소연할 데도 없었다는 것이다.

개만도 못한 한인들의 처지와 참상은 1905년 7월29일 한 중국인의 제보가 황성신문에 실리면서 한국에 알려졌다.

고종 황제가 동포를 빨리 송환하라는 어명을 내리고 하와이 등 미국 한인사회에 구조운동이 전개돼 차관급 외교관리 윤치호가 실태조사를 위해 멕시코로 출발했으나 을사보호조약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은 일본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메리다 한인회 율리세스 박 이(63) 회장은 "이민 선조들은 돌아갈 배값을 저축하느라 토르티야(옥수수가루 전병)에 소금만 쳐 궁핍하게 먹고 살면서 귀국할 날만 학수고대하다 1909년 5월 마침내 4년간의 계약기간 만료로 자유의 몸이 됐다.

그러나 한인들은 반겨줄 조국이 망해버린 절망감에 빠져 힘겨운 농장생활을 계속하거나 1910년 멕시코혁명으로 들어선 새 정부의 외국인 배척정책과 인종차별 때문에 멕시코 전역으로 뿔뿔이 흩어져 유랑하면서 하층생활을 했다"고 밝혔다.

"어른들은 조국에 돌아갈 생각에 스페인어를 안배워 고생이 더 심했다.

그들은 항상 머나먼 한국만 그리다가 이국 하늘을 떠도는 불쌍한 고혼이 되고 말았다.

생전에 결혼이나 생일잔치, 장례식 등 행사가 있으면 모여 술을 마시고 애통하게 한국노래를 부르곤 했다.

술에 취해 고국쪽 하늘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고 통곡하기 다반사였다.

우리들은 영문을 몰라 부모님만 쳐다보다 괜히 슬퍼서 따라 울었다". 유카탄의 이민 2, 3세대 후손들은 이같이 토로했다.

유카탄=강병균기자 kbg@busa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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