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인터넷은 악동천하

대구지하철 참사사고가 일어났던 지난달 18일. 온 국민이 경악과 슬픔 속에 빠져들었지만 인터넷 한편에서는 주목할 만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계속되는 뉴스 속보로 인해 상당수 TV프로그램이 예정대로 방영되지 않으면서 이를 기다리던 어린이들의 불만이 인터넷 게시판에 쏟아진 것. 일부 언론이 이를 도덕불감증으로 몰아붙이자 게시판도 비난과 욕설로 뒤덮였다.

그러나 이번 사건은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 어린이들의 TV시청 행태, 인터넷 이용 습관, 스타신드롬 등 어린이 문화의 현주소를 보여줬다는 점에서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

▨인터넷에서 무슨 일이

지하철 참사가 일어난 지난 18일 밤 MBC 시트콤 '논스톱'이 뉴스속보로 불방됐다.

프로그램의 인터넷 게시판은 방송시간 전부터 북적거렸다.

"오늘 왠지 논스톱 안할 듯, 이럴 때 사고 나서 정말 짱나" "뉴스속보 물러가라 사고난거 자랑하냐" "정말 너무합니다.

속보는 맨날 똑같은 소리만 하는데 사망자나 부상자가 추가로 발견됐으면 밑에 자막으로 알려주면 되잖아요" "논스톱을 좋아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그깟거 하나 때문에 논스톱을 안하는 건 너무 심하네요". 한 중학교 1학년생은 "우리 가족 안 다쳤는데 왜 역지사지해야 하는 거냐"며 심한 표현을 썼다가 게시판 관련 언론보도를 접하고 찾은 네티즌들에게 집중적인 비난을 받았다.

네티즌들이 IP 추적까지 나서자 사과글이 올라오기도 했지만 비난은 며칠 동안 숙질 줄 몰랐다.

같은 날 SBS 토크쇼 '헤이헤이헤이'도 방영되지 않으면서 인터넷 게시판이 뜨거워졌다.

인기그룹 god의 출연이 예고돼 이를 기다리던 소녀팬들이 뉴스특보로 '오빠'들을 볼 수 없게 되자 2천건이 넘는 항의글로 게시판을 도배한 것. 특히 한 소녀팬은 "내게는 200명의 목숨보다 오빠들이 중요하다"는 글을 올리기도 했다.

이에 대해 상당수 팬들이 대신 사과글을 올리기까지 했지만 언론보도가 되면서 이 게시판은 물론 해당 그룹 게시판에까지 성토 글이 쏟아졌다.

▨왜 이런 일이

전문가들은 이번 일을 단순히 어린이들의 철없는 행동으로 봐서는 곤란하다고 지적했다.

심각한 TV 중독과 특정 스타에 대한 도를 넘은 애정, 욕설이든 뭐든 거칠 것 없이 인터넷 게시판에 써대는 네티켓 교육 부재 등 복합적인 원인이 작용했다는 것.

굳이 이들 게시판의 지하철 관련 글들이 아니라도 참사 전, 참사 후 다른 글들을 살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특정 연예인에 대한 좋고 싫음을 두고 어린이들이 벌이는 비난과 맞대응이 짜증스러울 정도로 계속되는 것. 프로그램의 내용과 관련된 이야기는 좀처럼 찾기 힘들다.

일부 어린이들은 무서울 정도의 인신공격과 욕설, 협박 등도 서슴지 않고 있다.

몇몇 극성스런 어린이들이 특정 프로그램에서 일부 연예인을 두고 벌이는 장난이라고 쉽게 넘기려 해서는 곤란하다.

어린이들의 이같은 게시판 글쓰기 행태는 다른 방송 프로그램 게시판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난다.

게임과 관련된 많은 게시판에서도 마찬가지다.

어린이들의 인터넷 이용은 이미 철자법이 틀리는 수준의 문제를 뛰어넘고 있는 것이다.

▨어른들에게 잘못이 있다

이번 일은 지하철 참사 못지 않게 우리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각종 매체가 나날이 발전하고 세계 최고 수준의 정보화 강국임을 자랑하고 있지만 사회와 학교, 가정 어디에서도 제대로 된 미디어와 인터넷 교육이 이뤄지지 않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가족 생활의 주요 매개가 된 TV를 어떻게 시청해야 하고 바르게 이용해야 할지에 대한 교육은 어디서도 찾아보기 어렵다.

'헤이헤이헤이'가 평일 밤11시에 방영되는 프로그램인데 그렇게 많은 어린이와 학생들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방송사의 무책임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어찌됐든 사전에 예고됐던 프로그램이 방영되지 못한다면 시청자들이 기다리지 않도록 충분히 알렸어야 하는데 그날 밤 그런 모습은 볼 수 없었다.

인터넷 게시판을 무관심하게 혹은 시청률 높이기를 위해 의도적으로 방치하는 것도 문제. 방송이 국민, 특히 어린이들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인터넷 게시판 이용 습관이 어린이들의 정서에 얼마나 영향을 미치는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미디어 교육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오래전부터 제기돼왔고, 김대중 정부는 공약으로까지 제시했지만 학교교육에는 아직 도입되지 않았고, 사회적으로도 거의 초보 단계를 넘지 못하고 있다.

이로 인한 폐해는 갈수록 심각한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지하철 참사와 함께 나타난 이번 현상은 그 폐해가 앞으로 얼마나 더해질지 가늠하기 힘들다는 우려스런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

김재경기자 kjk@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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