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민들이 주로 이용하는 대구 지하철에서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되는, 너무나 안타까운 사건이 일어났다.
공공시설에서 방화사건이 일어났다는 점도 믿기 어렵거니와, 비교적 적은 피해에 그쳤을 수 있는 사건이 대참사로 이어진 것에 아연실색할 따름이다.
방화범들은 직접적으로 폭력을 행사하는 살인·강도·강간 등 다른 강력범죄에 비해 죄책감을 덜 느낀다고 한다.
방화범들은 또한 불 자체의 묘한 매력에 이끌리기도 하며 불이 모든 것을 태워버림으로써, 숨기고 싶거나 없앴으면 하는 사물 혹은 대상을 은폐하거나 깨끗하게 만들 수 있다는 심리상태를 보이기도 한다.
방화는 원한과 분노, 장난과 악의, 범죄 은폐, 경제적 이익 등 다양한 동기에 의해 일어난다.
이번 사건의 발단은 좌절하고 사회적으로 지원받지 못한 한 개인이 저지른 방화 행위이다.
주목할만한 점은 가해자의 범행 동기가 범죄 결과에 비해 상대적으로 경미한 경우가 흔하다는 사실이다.
불은 걷잡을 수 없이 번지는 속성을 가지고 있으며 대상을 가리지 않는다는 점에서 다른 어느 범행 수단보다 위험하고 대형 참사의 원인이 될 수 있다.
우리는 이번 사건이 단순히 일회적이고 예외적인 사건이길 바란다.
그러나 작금의 범죄상황을 보면 유사 사건이 재발할 가능성이 상존하고 있어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대검찰청 범죄분석에 의하면 1998년을 기점으로 범죄가 폭증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방화만 해도 1997년에는 776건이던 것이 1998년에는 1천157건으로 크게 늘어난 뒤 2001년에는 1천375건으로 꾸준한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
요즘에는 범죄자의 고령화·고학력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이는 우리 사회의 중추이자 안정 세력이라 할 수 있는 중산층과 중·노년층이 경제 위기를 겪으면서 경험한 고통이 범죄현상으로 반영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블특정 다수를 상대로 별 다른 이유 없이 저지르는 사건도 빈발해 사회적 안전을 크게 해치고 있다.
이런 변화는 즉흥적이고 폭력적인 인간관계가 만연하는 우리 사회의 부정적 변화 양상을 반영하는 것이다.
이처럼 범죄가 빠르게 증가하고 질적으로도 심각하게 변화하는 것은 1997년말 외환위기 이후 우리 사회가 경험한 위기의 부정적 영향이 가시화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게다가 지역으로 갈수록 위기의 징후가 더욱 뚜렷하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지난 몇 년 사이 국가적으로는 경제위기가 어느 정도 극복됐다고 하지만 지역경제는 과연 얼마나 회복되었는지, 지역주민의 고통은 얼마나 완화되었는지 심각하게 묻지 않을 수 없다.
범죄는 예방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관련 연구들을 보면 공중밀집시설의 방화를 예방하는데 효과적인 것은 잠재적 범죄자에 대한 감시와 처벌보다, 취약한 시설에 대한 경계와 감시를 증가시키는 '대상 강화 전략'이라고 한다.
지하철을 비롯한 공중밀집시설의 안전성을 향상시키고 대형재난에 대한 경보 및 대응시스템 등을 대폭 개선하는 것이 시급하다.
그러나 이런 조치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무엇보다 범죄가 발생하는 사회구조적 맥락을 외면해서는 안될 것이다.
범죄를 줄이고 유사 사건의 재발을 막기 위해서는 사회복지를 강화하고, 한계상황에 처하거나 잠재적인 위험요인을 가진 집단을 적극적으로 끌어안는 정책적 배려와 지원이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한가지 꼭 짚고 넘어갈 것은 사건 현장의 훼손 문제다.
사건의 전모를 밝히고 유사 사건 재발을 방지하며 대형 재난에 대한 체계적 대응 방안을 마련하기 위해 사고 현장은 보존됐어야 했다.
미국·일본을 비롯한 외국에서는 대형 재난이 일어나면 충분한 시간을 두고 사건을 치밀하게 조사하고 이를 철저히 분석해 백서로 발간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우리는 혹시 너무 조급하고 신속한 해결만 추구한 나머지 사건을 왜곡하거나, 엄청난 희생을 치렀음에도 불구하고 미래를 위해 반드시 얻어야 할 교훈을 너무 쉽게 포기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걱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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