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천은 어떤 모습으로 흘러왔을까.
우선 이공제비를 살펴보면 신천은 1778년 이전엔 대구 시가지를 가로질러 흐른 것으로 기록돼 있다.
팔조령과 정대에서 흘러내려온 물이 용두산, 수도산 및 건들바위 밑, 반월당, 달성공원을 거쳐 달서천과 합류됐고, 다시 팔달교 부근에서 금호강으로 흘러들었다고 한다.
이때문에 비가 많이 오면 물이 시가지로 넘쳐 침수되는 등 피해가 극심해 대구 판관으로 부임한 이서가 부임 2년 뒤인 1778년 사재를 털어 물길을 돌리고 제방을 쌓는 대역사를 감행했다고 전하고 있다.
때문에 새내란 뜻인 신천으로 불리게 됐고, 제방은 이공제라 불리게 됐다고 전한다.
주민들이 이서의 선정을 기리기 위해 이공제비란 비를 세웠다고 한다.
그러나 신천이 판관 이서에 의해 생긴 내가 아니라 원래부터 그곳에서 흘러온 내라는 주장도 있다.
이서가 판관으로 부임하기 훨씬 전인 중종 26년(1531)년에 출간된 신증동국여지승람과 영조 44~47(1768 ~1771)년 사이에 출간된 대구읍지 등에 따르면 이미 신천으로 불려지고 있었다는 것. 또 이들 고서에 의하면 신천의 위치를 부(府)의 동쪽 4리라고 해 현재의 위치와 같다고 한다.
이정웅 대구시 녹지과장은 "신천은 새로운 내라기보다 무엇과 무엇 사이에 있는 '샛(내)강'의 의미였지만 별다른 검증없이 새로 생긴 강으로 받아들여진 것 같다"며 "이서는 단지 신천의 많은 지류 중 시내로 유입되는 한곳을 짧게는 몇m에서 몇백m를 막아 물의 흐름을 오늘날의 신천으로 흐르도록 한 것에 불과할 뿐이다"고 말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뒤로하고 신천은 계속 변모했다.
아이들이 물장구치고 아낙네들이 빨래하던 신천은 1960년대 들어 신천 상류에 가창댐이 건설되고 근대적 하수시설인 암거가 설치되면서 신천의 형태와 물길이 변하게 된다.
주변 소하천의 유입수가 줄어들고 특히 70년대 도심을 관통하는 대부분의 소하천이 복개되면서 신천의 수량이 급격히 감소하고, 오·폐수 유입으로 자정 작용까지 상실한 죽은 하천으로 변했다.
이에 1980년대 죽어가는 신천을 살리기 위한 대대적인 정비 사업인 신천종합개발이 시작된다.
이 사업을 통해 신천이 정비되긴 했지만 원래의 자연형 하천이 아닌 콘크리트로 덮이고 물길이 직선화된 하천으로 변하게 됐다.
가창교에서 금호강 합류지점까지 12.4km 전구간에 걸쳐 하도가 정비되고, 콘크리트 호안 블록으로 제방이 쌓여졌다.
또 하천 양쪽 둔치에 41만8천㎡의 둔치가 생겼다.
또 지난 97년엔 말라붙은 신천에 물이 흐르도록 하기 위해 펌프장이 만들어졌고, 수질 정화를 위해 신천하수처리장과 고도처리시설까지 설치되면서 지금에 이르렀다.
이호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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