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년째 어둠 속에서 환한 빛을 밝히는 경산지역의 야학(夜學) '우리학교'.
경산시 중방동 경산새마을금고 지하 70여평엔 8평 남짓한 교실 3칸과 교무실, 식당을 겸한 공간이 있다.
쌀·라면 등 부식과 밥그릇, 수저 등 주방기구들을 모두 갖춰져 있고 저녁식사 때마다 따뜻한 밥과 반찬을 만들어 늦깎이 동료 학생들과 교사들이 늦은 저녁식사를 해결한다.
직장일이나 교통문제, 수업 때문에 저녁식사를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하루 20인분 이상의 쌀이 소비될 정도다.
교실 문을 살짝 열었다.
배움에 굶주린 10대부터 60대까지 40여명 학생들이 자식이나 동생같은 선생님들의 설명을 한마디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귀를 쫑긋 세우고 있다.
"가나다라…, ABCD…". 기초적인 것부터 복잡한 받침 때문에 약간 어려운 한글 받아쓰기 등 학생들의 능력에 맞는 수업이 진행 중이었다.
일방적인 가르침이 아니다.
40여명의 학생들과 15명의 교사들이 서로가 서로에게 배우는 공간. '우리학교'는 현 최승호(40) 교장 등 지역 교육·문화운동에 앞장섰던 몇몇 청년들이 힘을 모아 지난 91년 11월 개교했다.
"초창기에는 60여명의 학생들이 모여 배우려는 열기가 대단했죠. 어렵사리 마련한 학교에 화재가 발생해 막막한 적도 있었고, 천 조각으로 교실을 나눠 쓰던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배움의 열정은 모든 어려움을 극복해 내더군요". 최 교장은 학교 건물을 마련하는 일도 적잖은 어려움이었다고 털어놨다.
여러번 이사한 끝에 지난 97년 현재 새마을금고 지하에 터를 잡았다.
월 35만원의 임대료를 내고 있었으나 경산새마을금고 윤만호 이사장을 비롯한 임원들이 야학의 뜻에 감동해 무료로 장소를 내주었다.
단돈 몇 만원의 돈이 아쉬운 판에 큰 도움이 됐다.
'우리학교'는 정규교육을 받지 못한 노동 청소년들에게 배움의 기회를 제공해 주기 위해 처음 문을 열었다.
현재 2학기 1년제로 운영되고 있는 이 학교에는 새날반(초등과정), 누리반(중등), 하늘반(고등)으로 나눠 학급당 15명 내외가 공부하고 있다.
반평생을 다 살고나서 배움이 무슨 필요가 있을까 싶은 학생들. 하지만 교복과 책가방에 한이 맺히고 배움에 목말라 생업의 피곤함도 이겨내며 나오는 사람들의 눈빛은 초롱초롱하다.
특히 새날반은 원서를 내고 1, 2년을 기다려야 입학 차례가 돌아올 정도로 인기다.
학생회장 심영재(44·대구시 신매동)씨는 "열두살부터 올해 62세인 이정자 할머니까지, 직업으로는 농부와 전업주부, 가구공장장, 식당 아줌마까지 그야말로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모여 공부하고 있다"며 "어려운 환경으로 제때 배우지 못한 한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모두가 한가족처럼 지내고 있다"고 했다.
누리반의 40대 농사꾼 성용경씨는 "친구로부터 소개받아 오게 됐는데 막상 농사를 지으면서 학업을 병행해보니 많이 힘들다"고 말했다.
새날반에 다니는 지체장애인 민순조(50·여·경산 진량읍)씨는 "장애인이 30, 40분씩 버스를 타고 야학까지 오는 일은 많이 힘들다"며 "하지만 글씨나 숫자도 잘 모르다가 하나 하나 알아가는 즐거움과 재미는 어느 것에도 비할데 없다"고 환하게 웃었다.
새날반에 모인 중년의 어머니들은 모두 비슷한 경험을 했다.
버스 번호나 행선지 표시를 읽지 못해 낭패를 겪었고, 계산법을 몰라서 13시(오후 1시)나 20시(오후 8시)라는 말을 듣고 눈만 껌벅거리기도 했었다.
지난 3월 새날반에서 누리반으로 진급한 신순득(46·경산 성암동)씨는 "초등학교만 졸업한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ABC를 처음 배우는 영어시간에는 더욱 집중하게 된다"고 말했다.
우리학교에서 가장 어린 학생인 김(12)양은 부모가 이혼한 뒤 엄마와 함께 생활하게 되면서 가정 형편상 아직 일반 학교에 가지 못하고 있다.
그는 "피아노를 쳐보고 싶지만 학원에도 갈 수 없어 야학에서 전자오르간으로 배우고 있다"며 "앞으로 일반 학교에 가게 되면 친구들을 많이 사귀고 싶다"고 말했다.
우리학교에선 국어·수학 같은 정규과목 외에 연극·서예·음악·풍물·컴퓨터·글쓰기, 시사상식 등 아주머니들을 위한 과목도 가르치고 있다.
우리학교에는 간혹 축하할 일도 생긴다.
이정우(30·대구대 역사교육과 3학년 편입)·도영인(27·여·대구성보교 특수교사)씨는 이곳에서 야학 교사를 하면서 정이 들어 최근 결혼했다.
야학에선 절대 결혼할 수 없다는 규정(?)이 있지만 현재 결혼한 커플만도 10여쌍. 오는 5월에도 2쌍이 결혼식을 올린다.
이-도씨 부부는 "육성회비를 못내 학교에서 쫓겨났다는 20대 초반의 여성, 학교 문턱은 밟아보지도 못했던 할머니 등의 기구한 사연을 듣노라면 열심히 가르쳐야 한다는 의지가 더욱 강해진다"며 "이곳에선 교사가 학생들을 가르친다기 보다 오히려 학생들의 풍부한 경험에서 나오는 지혜를 배운다"고 말했다.
야학의 '대물림'도 있다.
야학으로 일궈낸 배움의 꿈을 이젠 더 어려운 환경에 있는 사람들이 이룰 수 있도록 돕는 사람들. 이들에게는 우리학교는 모교인 동시에 지금은 교사로서 제자들을 가르치는 곳이다.
새날반 이순필(45·여)씨는 이곳에서 3년간 공부한 뒤 중·고교 검정고시에 합격, 지난 2000년 3월부터 모교에서 후배들에게 한글을 가르치고 있다.
"9남매중 일곱째로 태어났죠. 육성회비 300원이 없어 학교 교장에게 불려간 적도 많았습니다.
집안이 워낙 가난하다보니 남자 형제만 학교를 마쳤습니다.
여자는 시집가면 그만이라는 생각 때문이었죠. 섬유공장에 일하다 37세가 돼서야 야학에 들어왔습니다.
이젠 제가 조금이나마 도움을 줄 차례죠".
어머니가 혼자서 검정고시를 준비하는 모습을 보며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고자 야학에 뛰어들었다는 이희정(21·대구대 물리교육학과 2년)씨. "야학을 민간 사회교육기관으로 육성할 필요가 있습니다.
정부가 학습공간 제공과 재정적 보조, 야학교사 생활을 경력으로 인정해주는 등의 작은 배려만 한다면 적은 비용으로 시민들을 재교육하는 야학이 더욱 활성화돼 큰 성과를 거둘겁니다".
최 교장은 중·고교를 중퇴한 학생이나 배움에 목마른 이들을 위한 대안학교나 공동체를 만드려는 소박한 꿈을 갖고 있다.
"야학을 단순한 봉사로 볼 것이 아니라 지역·사회운동으로 보고 지원해야 합니다.
중·고등학교 진학률이 거의 100%에 육박하고,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대학에 진학할 정도로 고학력시대가 됐습니다.
그럼에도 아직 우리 사회에는 배움에 목말라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갖가지 어려운 여건 속에도 서로를 존중하며 또 서로에게 배우는 '우리학교'는 비록 지하실이지만 4월 화창한 봄볕이 가득한 학교의 모습이었다.
문의 011-802-9512, 홈페이지 http://wory.wo.to
경산·김진만기자 factk@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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