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마이가 집을 나간지 닷새나 됐는데, 어쩌고 있는지...".
지난 26일 오후 대구 칠성동 속칭 쪽방 동네. 방문 진료 나온 의사 임부돌(여.39) 박사가 들어서자 송두준(73) 할아버지는 부인 걱정부터 했다.
팔을 걷고 혈압을 재는 동안에도 마찬가지. "한 리어카 주우면 3, 4천원이라도 번다며 나갔는데..."
청각장애인인 할머니(71)는 평소처럼 종이를 주우러 칠성시장과 양키시장 쪽으로 나간 후 며칠째 감감 무소식이라고 했다.
좁은 방 벽엔 '아들집'이라며 전화번호가 빨간 사인펜으로 적혀 있었으나 아들은 통 찾아오지 않는다고 했다.
옆방엔 주워온 종이상자들이 널부러져 있었다.
그래서인지 집안에는 영 생기가 없어 보였다.
대낮인데도 3평이 채 안되는 마당의 햇빛까지 쓸쓸하게 느껴졌다.
할아버지의 볼과 손등에는 피가 말라붙어 있고 상처가 심상찮아 보였다.
중풍으로 불편하다보니 며칠 전 화장실에 가다가 유리문을 부딪치며 쓰러졌다는 것. 마당엔 유리 파편들이 흩어져 있었다.
그러나 의료보험료는 몇달째 연체 중. 좁고 허름하나마 집이 있고 자식이 있어 정부 지원을 받지 못한다고 했다.
이 날은 거동 불편한 할아버지가 모처럼 의사선생님을 만나는 날이었다.
임 박사가 당뇨냐고 물었으나 할아버지는 당뇨가 뭐냐고 되물었다.
진찰 결과 할아버지는 중풍 후유증과 영양 부족, 심각한 변비를 앓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임 박사는 할아버지가 처방전을 받아 온 적 있는 병원에 진찰 결과를 통보해 주겠노라 약속하고서야 일어섰다.
휑한 할아버지의 모습이 눈에 계속 밟히는지 임 박사는 돌아 나오면서도 걱정이 많았다.
"이 분들께는 가난과 질병은 늘 가까이 있는 반면 병원은 너무 멀리 있습니다.
물론 사회적 약자는 어디든 존재하지요. 문제는 그 약자가 그 상황을 벗어날 수 있도록 사회가 어떻게 기회를 제공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임 박사는 대구 인의협(인도주의실천 의사협의회) 회원. 지난해 6월부터 동료 회원 의사 20명과 함께 대구 쪽방상담소 방문진료 봉사팀으로 활동 중이다.
진료 대상은 칠성동.신암동.대신동.달성동.비산동.향촌동 등에 사는 1천여명의 쪽방 거주자들.
매주 수요일 저녁이면 의사1명, 쪽방상담소 관계자 1명, 영남대의대 '나눔자리' 동아리 대학생 1명 등 3명씩이 조를 이뤄 20~30가구씩 찾는다.
환자의 상태가 많이 나쁘면 방문 갔던 의사들이 자신의 병원으로 데리고 가 무료 진료할 때도 있다.
가끔씩 빈혈 앓는 할머니한테 소고기를 사 주거나 담배값이나 생활용품을 전할 때는 의사들이 호주머니를 턴다.
임 박사는 '의사 선생님이 우리 집을 찾아 줬다'는 사실만으로도 행복해 하는 쪽방 거주자들을 보면서 보람도 많이 느낀다고 했다.
그러나 쪽방동네 질병과 빈곤의 악순환 퇴치에 청진기만으론 부족하다는 것을 더 깊이 깨달았다고 했다.
습관화된 술 마시기, 불규칙한 식사, 영양 부족, 질병, 외로움, 탈출구가 안보이는 날품팔이 인생...
"2001년 대구지역 쪽방 실태보고서에 따르면 가장 급한 것은 쪽방상담소 설립이었고 다음으로 꼽힌 것은 의료서비스였습니다.
이들 중 상당수가 주민등록 말소나 정부의 기초생활 보장 제외 등으로 병원 문턱조차 밟기 힘들기 때문이지요. 많은 사람들의 노력으로 주민등록 말소자는 최근 3년만에 전체의 60%에서 30%로 줄었다지만 상황은 여전히 심각합니다".
비산7동의 월세 12만원 짜리 쪽방에서 사는 건설 일용직 근로자 이모(49)씨 경우 술로 날을 보내다 최근 폐결핵에 간경화까지 겹쳤다는 진단을 받았으나 의료보호 2종이면서도 그마저의 자부담이 두려워 병원에 갈 엄두를 못내더라고도 했다.
그래서 의사들이 또하나 벌인 사업의 현장은 무료검진소. 인의협과 수성구의사회가 주축돼 올해 초 동대구역 무료급식소 옆에 검진소를 설치해 매주 금요일 저녁 진료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수성구 의사 6명이 돌아가며 진료와 처방을 담당한다고 했다.
지난 23일 오후 7시쯤 그곳에서는 부슬부슬 내리는 비를 피해가며 70여명의 노숙자들이 선 채로 밥을 타 먹은 뒤 천막 안 검진소로 차례차례 약을 타러 가고 있었다.
그 중 절반 가량은 주민등록이 말소돼 여기가 아니고는 약조차 탈 수 없다고 했다.
많이 타 가는 약은 고혈압약이나 진통제. 약을 받아 든 사람들은 빗속을 걸어서 또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의사 김근우씨는 "가끔 '약탐'이 많은 분이 있어서 2주치 약을 한 주만에 다 먹는 경우도 있다"고 걱정하기도 했다.
이 무료검진소 운영 계기는 정부의 사회안전망에서 소외된 사람들의 지원 네트워크 구축에 방문진료 의사들이 관심을 갖게 된 것이었다고 했다.
때맞춰 대구 쪽방상담소가 '쪽방 거주자를 위한 의료지원 사업'을 보건복지부에 신청하자 흔쾌히 참여했다는 것.
인의협.수성구의사회.대구쪽방상담소 등은 오는 11월까지 이 의료지원 사업을 계속한 뒤 세미나를 거쳐 쪽방 거주자와 노숙자들이 잘 걸리는 병의 종류, 분포, 의학적 대응책 등을 정리.정립할 계획이라고 했다.
어느 동네 쪽방 거주자들 중에는 40~50대 일용직이 많고 알콜 중독이 흔하며, 또다른 동네 쪽방 거주자들은 거의가 60~80대 직업 없는 노령자이거나 만성질환자라는 등의 분석이 그것. 그걸 바탕으로 보다 체계적인 방문진료와 사후 관리책을 세우겠다는 생각이 밑바탕에 깔려 있는 듯했다.
인의협 회원이자 수성구의사회 소속이기도 한 외과의 임재양(49)씨는 더 많은 민간 네트워크가 필요하다고 했다.
"국가가 책임져 주지 않는 복지의 틈새를 위한 민간그룹들의 연계.협력이 활발해졌으면 합니다
쪽방상담소가 우리의 의술을 베풀 수 있는 장을 마련해 준 것처럼 말입니다". 수성구의사회는 매일신문 '아름다운 함께살기' 제작팀과도 네트워크화해 어려운 이웃을 돕기로 했다.
최병고기자 cbg@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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