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말골목', '돼지골목', '함석 골목'….
대구시내 곳곳에는 한 품목을 집중적으로 취급하는 독특한 명물 거리들이 많다.
하지만 최근에는 전반적인 재래시장의 쇠퇴와 경기침체로 명물 거리들이 약화되고 있는 실정이다.
옛 명성을 간직하고 있는 '헌책방거리', '야시골목', '봉산문화거리'를 찾아 명물거리의 현주소를 살펴본다.
최세정기자 beacon@imaeil.com
# 헌책방거리
헌책방으로 이름을 떨쳤던 남문시장 책방거리. 한때 '알뜰파'들로 북새통을 이뤘던 거리지만 이젠 이곳 거리에서 사람들의 모습을 찾기란 여간 힘들지 않다.
헌책방이었음을 알리는 간판만 걸려 있을뿐 대부분 책방들이 이미 문을 닫았다.
현재 영업중인 책방은 불과 5, 6곳. 30여곳의 책방들이 골목골목에 들어서 있던 모습이 까마득한 옛날 기억만으로 남았다.
30여년째 이곳에서 헌책방을 운영하고 있다는 '대도 서점' 사장에게 헌책방 거리의 분위기를 묻자 대뜸 "보면 모르느냐"며 반문한다.
"살기가 좋아지고 자녀들도 한 둘뿐이니 교육열 높은 부모들이 헌책을 사주겠느냐"며 "집세도 안나오는 실정"이라고 한숨이다.
바로 옆 '해바라기' 서점 주인도 "다른 일을 할 수만 있다면 당장 그만두고 싶은 마음 뿐"이라고 했다.
책방엔 구석구석 빛바랜 전집류들과 교과서, 참고서 묶음이 수북이 쌓여 있을 뿐이다.
54년 2평 남짓한 공간에서 책방을 시작했다는 '월계서점' 차석규(71)씨는 "그 때는 손님들이 헌책을 사기 위해 줄까지 서곤 했다"고 회상했다.
IMF시절 헌책을 다시 찾는 사람들이 반짝 늘었다가 이후 계속 내리막길이라고 한다.
또 다른 헌책방 거리인 대구역지하차도 부근. 그 곳은 대부분 책방들이 이미 문을 닫은 상태다.
'가격파괴', '소설, 시집 500~1천원에 판매' 등의 문구가 붙어있는 책방은 그나마 서너 곳에 불과하다.
나머진 성인용품점, 동양화, 수석판매점 등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빛 바랜 책들 가운데 낡은 테니스 라켓, 장구, 도자기 등을 쌓아놓고 판매하고 있는 '청교서점'의 오익현(61)씨는 "23년 전에는 이곳에만 헌책방이 40여곳이 있었지만 지금은 대부분 업종을 변경한 상태"라고 한다.
오씨도 헌책만으로 장사가 안돼 2년 전부터 골동품들도 함께 팔고 있다.
몇 년은 충분히 묵었을 것 같은 낡은 책들 사이에서 신문을 읽으며 소일하는 오씨의 모습은 사라져가는 헌책방거리의 한 풍경으로 남았다.
# 야시골목
시내 중심가에 위치한 고려양봉원에서 금융결제원 사이엔 수십곳의 여성복 가게들이 모여 있다.
이름하여 '야시골목'. 이전에는 술집거리였지만 90년대 초부터 여성의류점들이 하나둘 들어서기 시작하면서 형성되기 시작했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최고의 호황을 누렸던 야시골목이었지만 지금은 한발짝만 들어서도 스산함을 느낄 정도로 위축돼 있다.
상당수 가게들의 유리창에는 '점포정리', '파격세일', '무조건 정리'라는 글자만 요란하다.
다점포를 운영하고 있는 패션멀티숍 '다이애나'의 경우 12개 점포 중 현재 영업중인 가게는 4군데에 불과하다.
4군데는 아예 점포를 정리한 듯 옷가지와 마네킹 등이 어지럽게 놓여 있다.
'패션붐'도 9개 점포 중 입구쪽 한 곳만 문을 열고 있고 나머지는 간판만 덩그라니 걸어 놓고 있는 실정이다.
토털패션몰 'FOX'도 사정은 마찬가지여서 15개 점포 중 8곳은 비었고 영업중인 가게마저 '점포정리'라는 글을 써붙여 놓았다.
이곳 사람들은 하나같이 "IMF때도 이렇지는 않았다"고 한다.
7년째 야시골목에서 여성의류를 취급해왔다는 전모(53·여)씨는 "지금 이곳의 경기는 7년전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라며 "예전엔 서울 동대문시장에 물건을 떼러 일주일에 두 번씩 다니기도 했지만 지금은 한달에 한 두번이 고작"이라고 하소연한다.
야시골목의 이러한 상권 약화는 대형 패션몰의 등장과 중저가 브랜드의 부상, 전반적인 경기침체 등 때문으로 분석되고 있다.
최근 4년새 동성로 부근에 새로 생겨난 대형 쇼핑몰만 해도 엑슨밀라노, 갤러리존, 밀리오레 등 세 곳이나 된다.
5년째 여성의류를 판매해온 이 모(25)씨는 "요즘은 워낙 옷 파는 곳이 많아져 손님이 흩어진데다 쇼핑몰까지 우후죽순으로 들어서면서 가격 질서마저 무너져 마진율도 많이 낮아졌다"며 "이젠 손님들도 이러한 사실을 알고 무조건 값을 깎으려고만 들어 장사하기가 점점 힘들어진다"고 답답한 심정을 털어놓았다.
이에 대해 홍선주(22·여)씨는 "야시골목에선 구경만 하고 정작 옷을 살 때는 백화점 등에서 중저가 브랜드의 옷을 구입하는 경우가 많다"며 "야시골목이라고 해서 가격이 특별히 싼 것도 아니고, 날씨도 더운데 옷을 사기 위해 땡볕에 돌아다니는 것도 쉽지 않다"고 한다.
이처럼 대부분 길거리에 위치한 야시골목은 날씨가 변수다.
야시골목과 붙어있는 남성전문 의류골목인 늑대골목의 '우모' 사장 송정옥(30·여)씨는 "지난해는 월드컵때문에 영업이 안됐고 올해는 사람이 많이 다니는 주말마다 비가 오고 날씨가 빨리 더워져 실적이 별로 없다"고 했다.
이에 야시골목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구책들이 동원되고 있다.
최근 1, 2년새 2, 3개의 상가를 한 개의 점포로 확장한다든지 고급스러운 인테리어로 탈바꿈한 의류점이 많이 생겨나고 있다.
또 만화캐릭터 전문점, 힙합패션, 수입 액세서리 가게 등 개성있는 품목으로 승부를 거는 가게도 적잖다.
# 봉산문화거리
대구시 중구 봉산동, 대구학원 입구에서 봉산오거리에 이르는 600m구간에 자리잡은 봉산문화거리. 문화거리를 알리는 장승 '문화대장군', '예술여장군'을 지나 골목을 접어들면 잠시 어리둥절해진다.
'문화거리'라는 표지판과는 달리 오락실, 각종 음식점, 오토바이 가게 등이 주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거리 곳곳엔 행사가 이미 끝난 '대구아트엑스포 공예축제' 깃발과 현수막이 아직 여기저기 걸려있다.
주차장을 방불케 하는 거리를 한참 걷다보면 그제서야 미술과 관련된 표구사, 공예점, 갤러리 등이 눈에 띄기 시작한다.
현재 봉산문화거리 내에 자리잡고 있는 화랑은 18곳. 화방은 6곳, 고미술·고서적 관련 업체는 10여 곳이다.
이 곳 화랑거리는 80년대 후반, 동아양봉원 부근에 밀집해있던 화랑들이 땅값 상승 등을 이유로 하나 둘씩 봉산동으로 이전해오면서 자연스럽게 형성됐다.
이후 91년 중구청이 이 거리를 '문화의 거리'로 지정하면서 '봉산문화거리'로 불리게 됐다.
봉산문화협회 정대영 회장(58·중앙갤러리 대표)은 "대구시 전체 화랑이 40여개 정도인데 이 중 절반 정도가 이곳에 몰려있다"면서 "그러나 문화거리로 지정만 됐을 뿐 뚜렷한 볼 거리도 없고 지원도 없다"고 했다.
송아당 화랑 대표 박춘자(63·여)씨는 "인사동처럼 붐비는 것은 원치않지만 옛 분위기를 살리되 약전골목처럼 분위기를 정비한다면 대구의 명소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내년 초 공연장과 전시장을 갖추고 지하1층 지상4층 규모로 완공되는 '봉산문화회관'에 대한 화랑들의 반응은 엇갈렸다.
사람들의 잦은 왕래로 문화거리가 활성화될 것이라 기대하면서도 이때문에 이곳을 떠나야 할지도 모른다며 걱정하고 있었다.
거리가 인사동처럼 활성화되면 집세가 비싸져 영세한 화랑들은 이 곳에서 떠날 수 밖에 없고 미술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발길도 점차 멀어질 수 있다는 것. 박춘자 대표는 "문화거리를 넓히는 등의 겉치레보다 옛 모습을 정갈하게 가꿔 대구의 대표적인 거리로 만들었으면 하는게 화랑인들의 바람"이라고 말했다.
최세정기자 beacon@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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