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문화와 사람-마임이스트 조성진씨

마임이스트 조성진(47)씨.

무대에서 혹은 거리공연장에서 만나면 수천가지의 얼굴표정과 몸동작으로 보는 이들의 온 신경을 집중시키게 하지만 이제는 트레이드 마크가 된 중절모만 아니라면 맘씨 좋은 옆집 아저씨쯤으로 지나칠 모습을 하고 있다.

그러나 그를 만나본 사람이면 대부분 여러번 놀란다.

40대 중반을 넘은 나이임에도 해맑은 얼굴로 늘 웃고 있음에 놀라고, 잠깐 이야기를 해보면 해박한 지식과 확고한 신념에 또 놀란다.

누구나 그랬겠지만 순탄치 않았던 지나간 시절동안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자신의 신념을 버리지 않았음에 마지막으로 놀란다.

사단법인 거리문화시민연대 이사장이 그의 공식 직함이다.

일의 편리를 위해 사단법인으로 만들었을 뿐이니 헛바람 든 것 같은 이사장보다는 그냥 대표로 불러달라는 게 그의 주문이다.

"나름대로 열심히 살았습니다.

순간순간마다 고비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문화운동에 대한 갈증과 해봐야겠다는 오기 같은 것들이 그 고비를 넘기는 에너지가 됐던 것 같습니다".

지난 40여년간의 생활은 하나의 투쟁일지와 같다.

목표는 '지역문화운동'이었지만 수많은 길을 돌아 오면서 시행착오도 많이 겪었다.

어릴 때는 그림을 잘 그리는 아이로 고교시절에는 합창단과 중창단을 이끄는 음악도였지만 목사의 딸이었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연세대 신학과에 들어갔다.

대학시절 그는 예배보다는 종교의식에 더 관심이 많았지만 첫 좌절을 겪는다.

이 좌절은 그의 평생을 좌우하는 계기가 됐다.

"그림과 음악에 자신이 있었지만 대학에 들어가니 모두 한가닥씩 하는 친구들이었어요. 그래서 남들이 잘 안하는 것을 해보자 싶어 선택한 것이 연극이었습니다".

굿과 탈춤을 도입한 마당극 형식으로 연극을 만들다보니 시위때마다 공연의뢰가 들어왔고 종교극회는 선동극하는 집단이 됐다.

거리문화의 중요성을 절감하게 되는 계기도 찾아왔다.

학교측의 반대로 무산됐지만 캠퍼스 전체를 무대로 하는 거리극 '예수의 고난'을 기획한 것. 이 극은 후배들에 의해 실현됐고, 군에 있던 그는 외출증을 끊고 나와 연출을 맡기도 했다.

마임을 배우게 된 것은 우연한 계기였다.

대학연합동아리 활동때 국내 마임배우 1호인 류진규(춘천 국제마임축제 위원장)씨를 강사로 초빙한 것. 조씨는 "아무 것도 없는 공간에서 자신이 상상한 것을 하나의 현실로 보여주는 움직임에 큰 매력을 느꼈다"고 기억한다.

1년여동안 경기도 부천 YMCA 사무국장으로 있으면서 누구나 참여 가능한 문화운동을 할 수 있는 조직 결성방법과 자신의 성격이 짜여진 조직에는 맞지 않다는 것을 배웠고 스스로 조직을 만드는 것으로 그 갈등을 풀었다.

"서울이라는 도시는 문화포화상태이고, 그외의 모든 곳은 문화기아상태였습니다.

이러한 불균형은 대도시와 농촌사이를 연결하는 중소도시에서 지역을 바탕으로 한 문화운동을 펼침으로써 해소가 가능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평택에서 4년동안 '열린 문화'라는 조직을 만들어 지역예술가들과 어울렸고 우연히 대구에 레크리에이션 강사로 갔다가 만난 대학생과 결혼에 이르게 됨으로써 마침 평택이라는 소도시에서의 문화운동에 지쳐가고 있던 조씨가 대구로 내려오는 계기가 됐다.

1회 동성로축제, 지구의 날 축제 기획, 왜관 YMCA 조직, 축제문화연구소에 이은 거리문화시민연대 설립, 거리마임축제 개최 등 본업인 마임보다는 문화운동에 더욱 관심을 기울였다.

도란도우(道瀾都友:거리에 물결을 만드는 도시의 친구들)라는 거리공연 네트워크를 만든 것도 그의 작품이다.

그에게 거리란 모든 문화운동의 발상지이자 삶 그 자체이다.

"거리는 공무원.이벤트회사.예술가 사이에서만 이뤄지는 축제를 일반 시민들에게로 끌어들이는 도구입니다.

시민들은 나름대로의 표현문화를 갖고 있지만 그 기회가 없을 뿐이고 거리공연은 바로 그 기회를 만들어주는 계기가 되기 때문에 무엇보다 중요한 공연장이고, 살아숨쉬는 생활 현장입니다".

정지화기자 jjhwa@imaeil.com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